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광장동상. 광화문 사진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경복궁 Seoul’s Viewpoint: Gyeongbokgung Palace Seoul City Official

 

경복궁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고 이름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業)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 정도전, 조선왕조실록 태조 4년 10월 7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중 하나이자 조선의 정궁, 법궁이다.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소재.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 천도를 단행하면서 조선 시대에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

 

 

광화문
光化門 | Gwanghwamun

 

↓[TV ZONE] A Time Machine Ride Back to the Past - Gwanghwamun Gate 

 

■ 현판(1867년 - 1951년), 임태영 作

 

■ 경복궁의 정문
■ 창건 : 1395.(태조 4년) 9월 창건
■ 1867.(고종 4년) 12월 재건
■ 1927.09.15. 해체 이전 : 일제 조선총독부 청사를 완공하면서 광화문을 해체해 이전
■ 1968.12.11. 재건 : 6.25로 소실된 것을 박정희 정권때 콘크리트를 사용해 복원
■ 2010.08.15. 재건 : 현재의 광화문
■ 설계 : 김사행 - 고려 말 조선 초의 환관. 고건축에 뛰어났다.

흔히 설계자로 알려져 있는 정도전의 경우 도시의 전반적인 틀을 그리고 이름을 작명하기는 했으나 건축학적인 의미의 설계는 아니었다.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정문.

■ 명실상부한 서울특별시,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중심지

■ 앞에는 500년 동안 조선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이 있다

■ 뒤에는 청와대, 광화문광장과 광화문 앞에는 정부서울청사가 위치해 있다.

■ 다른 여러 나라들의 개선문 역할
■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 집회 등 시민 집회 로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

 

현대에는 '광화문'이란 명칭 자체가 성문으로서의 광화문 뿐만 아니라 세종대로, 광화문광장 등을 포함한 법정동 세종로 및 그 주변을 통칭하는 지명으로 더 많이 쓰이는 감이 있다.

 

↓광화문 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1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2

 

실제 세종대로와 종로, 새문안로가 교차하는 세종대로 사거리도 실제 광화문에선 약 600~700m 가량 떨어져 있지만, '광화문 네거리(사거리)'라고 많이 불린다. 의정부와 육조 관청들이 들어서 조선 시대부터 핵심 행정 기능을 수행했던 지역으로, 숭례문 등과 더불어 서울의 역사가 함축된 곳 중 한 곳이라 볼 수 있다. 즉, 서울의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광화문 야경 타임랩스

 

 

 

사진으로 보는 광화문 변천사

참고자료 : 문화재청

 

↓[TVZONE] Gwanghwamun Gate through the Years ⓒ문화유산채널

 

1890년대의 광화문 전경 : 고종 때인 1865년 흥선대원군 주도로 경복궁과 함께 중건된 것으로, 일제에 의해 훼손당하기 전 모습니다. 문 앞쪽으로 월대(돌계단)와 좌우의 돌 난간이 뚜렷하게 보인다.

 

1923년 일제가 경복궁에서 개최한 조선부업품공진회 때 입구로 사용된 광화문 : 좌우 석축 부분에 일본식 장식문양이 붙어 있고, 가운데 입구에는 일장기가 드리워져 있어 광화문의 수난을 잘 보여준다.

 

1926년 일제가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강제로 이전한 뒤의 광화문 모습 : 일제는 당초 광화문을 헐어버리려다가 여론의 반대가 거세자 경복궁 동쪽 문인 건춘문의 북쪽으로 옮겼다.

 

6·25전쟁때 파괴된 광화문 : 목조 누각은 불에 타 완전히 사라지고 육축만 남았다.

 

1969년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경복궁 남쪽에 복원된 광화문의 현판제막식 : 위치가 원래 자리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옮겨졌고, 각도도 경복궁 중심축에서 3.75도 틀어졌다.

 

 

광화문 타임머신 : 자료 문화유산채널

 

 

1395.(태조 4년) 9월에 경복궁이 건설될 때 처음 지어졌으며, 원래는 그냥 정문(正門)이라고 했다가 1425.(세종 7년)에 광화문으로 개칭되었다. 태조때 이미 광화문이라고 불렸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광화문이라는 이름은 세종 때 붙여진 것이 맞다.

 

세종 전까지 쓴 이름은 사정문(四正門)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실록에서는 이런 이름은 당대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성종 때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광화문, 흥례문(홍례문), 근정문에 청기와를 덮으려 하였으나 정괄이 저지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이 불타면서 같이 무너졌다. 이후 273년간 공터로 있다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1865년 재건되었다. 이때의 현판은 당대의 서화가 정학교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무관 임태영의 글씨.

 

 

광화문 앞의 해태

 

 

광화문 앞에도 한 쌍 놓여있는데, 이것은 해태가 법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경복궁을 지을 당시 관악산이 품고 있는 화기를 불을 먹는 해태를 통해 억누르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원래는 사헌부의 상징으로 광화문에서 50 m 정도 떨어진 육조거리에 있던 것을 옮겼다. 또한, 해태상 자체도 흥선대원군이 집권해서 왕권강화한다고 경복궁을 중창할 때 새로 만든 것이다. 이후에도 해태상은 조선총독부 건물 앞으로 이동했다가, 결국 한국전쟁 이후에 광화문을 재건하면서 해태상도 현 위치로 옮겼다.

 


즉 본래는 사헌부 앞을 지키면서, 지나다니는 관리로 하여금 정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저지르지 않도록 경계하는 역할이었다. 그러다가 흥선대원군이 이동 명령을 내려 한국 사람들에게는 더욱 친숙한 동물이 된 것이다.

 

참고 문서 : 해태 해치 : 상상의 동물, 법法의 어원

 

 

기타 광화문 관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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