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 미국 한 대학에서 13세 유관순 열사 사진 발견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지난 28일 충남역사박물관에서 '충남인의 100년 전 생활상' 특별전을 열면서 유관순 열사로 추정되는 사진을 공개했다.  공개된 사진 속 유관순 열사는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40여 명의 여학생이 4줄로 나란히 서 있는 단체 사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이 사진이 찍힌 시점이 1915년 7월이며 유 열사의 영명학교 재학 시기가 겹치기 때문에 단체 사진에 유 열사가 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했다. 

 

기사 : www.wikitree.co.kr/articles/586032

이번에 공개된 이 사진은 전직 언론인 임연철 박사가 '이야기 사애리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미국 드루대 감리교 문서보관서 현지 조사를 하는 중에 발견됐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새롭게 공개된 유관순 열사 사진에 29일 한 네티즌은 자동 사진 보정 기술을 사용해 흐릿한 사진을 선명하게 편집했다.  보정된 이 사진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화제 됐다. 사진을 올리면서 한 네티즌은 "어떤 분이 remini라는 앱으로 자동 보정한 것이라는데 105년 전 사진이 되살아난 것처럼 너무나 생생합니다. 눈빛도 모습도 왠지 슬퍼 보입니다"라고 했다. 

 

↓복원된 얼굴


유관순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오 하나님, 이제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원수 왜(倭)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 - 유관순 편 국가보훈처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 1902.12.16. 現 충남 천안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출생

■ 1920.09.28. 향년 17세 사망 : 경기도 경성부 현저정 서대문형무소
■ 이화여자고등학교 명예졸업 1996.05.30.
■ 신체 : 151.5cm
■ 가족 : 유중권(부), 이소제(모) 유계출(언니), 유우석(오빠), 유인석(남동생), 유관석(남동생)

■ 1962.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으로 건국공로훈장 단장(현재의 건국훈장 독립장, 3등급)이 추서
■ 1972. 유관순 열사 생가터가 사적 제 230호로 지정

■ 1974. 유관순 기념관 - 이화여자대학교

■ 1985.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설립

■ 1996. 유관순 열사에게 명예 졸업장 - 이화여자고등학교 

 

생가 : 출처 링크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와 탑원리에 있던 유관순 열사의 생가터가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생가 옆에 매봉교회를 만들어 유관순의 유지를 받들어 기념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매년 2월 28일에 3·1절 경축전야제를 개최한다.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

1919년 양력 4월 1일, 음력 3월 1일

1919년, 3.1 운동 이때 유관순은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시기였다. 당시 교장 룰루 프라이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참가를 말렸지만,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참가했고 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에 전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자, 함께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만세운동 중 유관순의 부모가 일제경찰에게 살해당했다. 이때 유관순 열사는 일본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간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 유관순 : 국사편찬위원회링크

투옥 때 촬영된 사진은 감옥 가기 전부터 고문당해서 얼굴이 부었으며 수심이 가득한 표정이 드러나 있다. 실제 인물은 청초하고 갸름한 얼굴이었다고 한다. 감옥에서 받은 고초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을 듯 하다.

 

 

모진 고문

 

1920.09.28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향년 17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던지, 이화학당에서 시체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거부할 지경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단다. 교장 룰루 프라이는 유관순의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러주었다.

최근 밝혀진 바로는 유관순은 옥사도 아니고 아예 일본 헌병들에게 장살(타살) 당해 사망했다고 한다. 기사

 

그러나 고문을 당하다 죽었는지, 아니면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것인지, 아니면 따로 죽인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연합뉴스 2019년 3월 8일자 기사 - [팩트체크]② 유관순 열사 고문·순국에 대한 사실 왜곡

 

 

유관순 어린시절

 

↓유관순 어린시절

유관순 傳記, 키 169.7㎝…3代 9명이 독립운동 : 유관순 유예도 박인덕외, 이화학당 재학 시절의 유관순(뒷줄 오른쪽 끝), 뒷줄 왼쪽 두 번째는 사촌언니 유예도, 중앙은 지도교사였던 박인덕

 

↓유관순 열사 왼쪽 이화여자대학교

2019.05.21 오전 서울 이화여대 내 이화역사관에서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시절 미공개 사진을 최초로 공개. 사진은 유관순 열사(왼쪽)가 이화학당 보통과 입학 직후(1915-1916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유관순 열사 왼쪽에서 다섯번째 ⓒ이화여자대학교

2019.05.21 오전 서울 이화여대 내 이화역사관에서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시절 미공개 사진을 최초로 공개했다. 사진은 유관순 열사(왼쪽 다섯번째)의 고등과 재학시절(1918년)로 추정. 

 

 

이화학당의 여성친일반민족행위자 김활란 모윤숙 노천명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유관순 열사의 업적이 유달리 많이 알려지게 된 이유가 이화학당 출신인들이 자신들의 친일행적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있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여성친일반민족행위자는 김활란, 모윤숙, 노천명. 이 세 명이 모두 이화학당 출신이다.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역시 이화학당 출신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였던 박인덕이 앞장 서서 유관순 열사의 3.1운동 업적을 내세웠다는 것. 

여성친일반민족행위자 세 명이 모두 이화학당 출신이라는 것은 이화여대의 영원한 흑역사. 심지어 이화여대에는 아직도 김활란의 동상이 있다. 정신 못차린 이화여대

 

 

유관순의 부모 형제

 

유관순의 부친인 유중권은 사재를 털어 고향에 학교를 세워 교육운동을 전개한 계몽운동가였다. 유관순 역시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유중권의 장남이자 유관순의 오빠인 유우석 또한 독립운동가로 동시기 공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역시 투옥되었다가, 공주지방법원 재판에서 유관순과 잠시 해후하기도 하였다.

 

여동생 유관순의 사망 이후에도 유우석은 활발히 항일투쟁을 벌였다. 독립을 본 후인 1968년 5월 28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유관순함

 

대한민국 해군은 2015년 3월 1일 손원일급 잠수함 6번함의 함명을 유관순함이라 명명하였다.

 

 

첨단무기 1800t급 잠수함, 해군최초 여성이름 딴 ‘유관순함’ 취역 ⓒ충청투데이

 

여성으로는 최초로 한국 해군함의 함명으로 결정된 것이다.

 

 

김완섭

 

유관순이 폭력 시위를 계획, 준비하고 주도했다며 '여자 깡패'라는 비난을 했다. 이에 2003년 재판부는 그가 유관순이 주도한 시위는 폭력적이었다고 하지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유관순에 대한 판결문 및 번역본 판결문에 의해 당시 시위는 평화 시위였음이 확인되는 바 김완섭의 기술은 허위 사실 적시에 해당되어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700만원 벌금형에 처한다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유관순이 '여자 깡패'라는 김완섭의 표현은 모욕적인 표현에 해당하지만, 국내 형법상 사자 명예훼손죄는 있어도 사자 모욕죄는 없기 때문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김완섭은 이것을 가지고 "법원이 나의 정당성을 인정했다"고 지껄였지만, 사자 모욕죄라는 항목이 없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만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일 뿐이지, 그가 유관순을 모욕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김완섭 영상 갈무리 ⓒKBS 

 

 

기타

 

참고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명단이 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에는 유관순 항목이 처음으로 등록되었다.

 

국무총리 후보였다가 친일 옹호 발언으로 말썽을 빚어 결국 물러난 문창극을 지지하던 여성들이 모인 유관순 어머니회라는 듣보잡 단체는 엄청 욕만 처먹었다.

 

당대 일본 제국은 근본적으로 인권을 보장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1920년대나 30년대 초반에 신문을 보면 단순한 절도 내지는 참고인 조사과정에서도 나체 고문 내지는 고문치사, 성적인 학대로 인한 자살사례가 보도 될 정도. 네이버 디지털 아카이브로 일제 강점기 동아일보를 한번 검색보거나 하면, 오히려 한국의 1980년대 이상으로 자세한 고문 고발 기사가 다이쇼 시대에는 버젓히 실렸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신문에 잘 안나거나 갑자기 사망식으로 은폐된 경우도 많다는 것을 보면, 유관순에 대한 무서운 일은 일반적으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조갑제의 회고에 따르면, 3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도 경찰서에 고춧가루 통을 가지고 가는 순경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5만원권에 들어갈 여성인물로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신사임당에게 밀렸다. 유관순 외에도 김구 선생이 들어갈 10만원권은 아예 발행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도 만세를 불렀다는 건 비중을 별로 두지도 않을 뿐더러,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없다. 부모가 모두 진압군경의 총칼에 사망했음에도, 잘 다뤄지지 않는다. 아마도 어린 소녀가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는 상징성 때문이리라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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