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와 그의 푸들 아트만

"개를 키운 적이 없는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쇼펜하우어가 한 말. 

 

↓화가 빌헬름 부쉬가 그린 쇼펜하우어와 푸들.

 

쇼펜하우어는 그의 푸들 아트만을 애지중지하며 매일 성실하게 산책시켰고 아트만은 비교적 오래 살았다. 사랑은 없다던 염세주의 철학자가 사랑을 개에서 찾은 것은 아이러니한 진리일까. 반려동물을 키우던 사람이 가장 슬픈 것은 바로 자신이 키우던 반려동물을 떠나보내는 일일 것이다. 쇼펜하우어처럼 나도 사람보다 우리 강아지를 좋아한다.

 

참고로 쇼펜하우어가 생전에 자신이 기르던 개의 이름을 증오했던 헤겔로 붙이고 구박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는 낭설이 있는데 국내에만 존재하는 오정보다. 쇼펜하우어는 생전에 동물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했으며 개 애호가로 유명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다음과 같이 쇼펜하우어를 평가한다.

"오늘날 문화가 이토록 천박하지고 황폐해지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기운찬 줄기와 가지를 내뻗을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뿌리 하나라도, 비옥하고 건강한 토양 한 줌이라도 찾으려고 헛되이 애쓴다. 그러나 도처에는 먼지와 모래뿐이니 모든 것은 마비되고 탈진해서 죽어간다. 이런 상태에서 마음 한 자락 둘데 없이 고독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자기상징은 뒤러가 그려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죽음과 악마와 동행하는 무장 기사'이다. 무쇠처럼 굳센 눈빛과 철갑옷으로 무장한 이 기사는 자신의 끔찍한 동행자들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희망도 품지 않으면서 자신의 말을 타고, 자신을 따르는 개와 함께 험난한 길을 혼자서 고독하게 걸을 줄 안다. 뒤러가 묘사한 이 기사가 바로 우리의 쇼펜하우어와 같다. 그는 모든 희망을 잃고도 진리를 추구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1788.02.22. ~ 1860.09.21.

 

 

쇼펜하우어의 사상

 

 

 

일생

 

1788.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항구 도시인 단치히 출생


1793. 2차 폴란드 분할로 단치히가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되자 가족이 함부르크로 이주


1797. 여동생 아델레가 출생. 아버지가 프랑스 르아브르에 있는 친구 집에 쇼펜하우어를 맡겼고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2년 간 지내며 프랑스어를 익혔다. 


1799. 프랑스에서 돌아와 상인 양성기관인 룽게 박사의 사립학교에 입학.


1800. 아버지와 함께 하노버, 칼스바트, 프라하, 드레스덴을 여행했다.


1803. 상인이 되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온 가족과 함께 유럽 여행을 했다. 이 여행은 상인이 되기 싫어하는 쇼펜하우어를 달래기 위한 것. 런던에 도착하여 신부 랭카스터의 집에서 머물며 영어를 익혔다.


1804. 프랑스를 여행했으며 다시 스위스, 빈, 드레스덴, 베를린을 거쳐 돌아왔다. 쇼펜하우어는 여행 도중에 사색하며 많은 일기를 썼는데 진지한 고민이 많았다. 


1805. 아버지가 창고 통풍창에서 떨어져 사망. 자살로 추정.


1806. 아버지 사망 후, 가족이 바이마르로 이주. 쇼


1807년. 어머니의 권유로 상인 실습을 중단한 후에 고타에 있는 김나지움에 입학.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엄청난 열정으로 학습했다. 고전어를 가르친 교사들은 쇼펜하우어가 미래에 뛰어난 고전학자가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 쇼펜하우어는 1년도 못가 김나지움을 자퇴.


1808. 쇼펜하우어는 에어푸르트를 방문했다. 


1809. 괴팅겐대학교 의학부에 입학.

한 학기 동안 의학을 공부했지만 철학에 더 흥미를 두었다. 대학에서 화학, 물리학, 천문학, 수학, 언어학, 법학, 역사, 비교해부학, 생리학 등 여러 강의에 적극 참여해서 공부함. 집에 돌아와서도 사색하며 꼼꼼히 공부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학교의 몇몇 천박한 교수들의 강의보다도 이미 죽고없는 과거의 위인들이 남긴 작품들이 더 가치있을 때가 많다고 생각했다. 강의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문과 논평을 많이 썼으며 몇몇 교수들의 의견을 비판하고 논리적으로 박살내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습득한 당대의 자연과학적인 지식을 토대로 철학적인 생각을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1810. 철학자인 고틀로프 에른스트 슐체(Gottlob Ernst Schulze)의 강의를 들었다.

슐체에게 특히 플라톤과 칸트를 깊이 연구해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스승 슐체의 진지한 조언은 쇼펜하우어에게 큰 영향을 끼침.


1811. 어머니가 당시 독일 문학계의 거장인 크리스토프 빌란트에게 쇼펜하우어가 철학 전공을 못하도록 설득해줄 것을 부탁함. 78세인 빌란트는 23세의 쇼펜하우어와 만나서 설득은커녕 쇼펜하우어의 태도에 감명받아 자상한 조언과 격려를 해주었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제대로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함. 가을에 베를린대학교 (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전학했다. 베를린대학에서는 동물학, 지리학, 천문학, 생리학, 시학, 어류학, 식물학, 조류학 등 여러 강의를 들음. 피히테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당대의 유명 학자였던 셸링, 피히테의 사상을 공부했으나 회의를 품고 이들을 혐오하게 되었으며 후에 자신의 저서에서 이를 대놓고 드러내었고 일기에도 비판하는 글을 썼다. 특히 피히테에 대해서는 "대중 앞에서 웅변을 토해내며 진지한 표정으로 심오한 사상가인 척하는 사기꾼" 정도로 평가했다. 반면에 스승과 제자로서 서로 잘 통한 일도 있었는데 바로 고전학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볼프의 강의였다. 볼프가 주도하는 고대 그리스 역사와 철학 강의에 쇼펜하우어는 존경심을 표했다.


1812. 플라톤, 임마누엘 칸트 등 여러 사상가를 본격적으로 탐구함. 베이컨, 존 로크, 데이비드 흄 등의 영국 사상가를 깊이 탐구함. 


1813.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연합군과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 사이에 전쟁이 재발

쇼펜하우어는 베를린을 떠나서 루돌슈타트에서 학위 논문인 <충족 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를 완성했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 사상의 기초가 되는 책이다. 이 논문을 예나의 튀링겐 주립대학교에 제출하여 철학 박사학위를 얻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에게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증정했다. 괴테는 이 논문을 보고나서부터 쇼펜하우어를 제대로 지지하였다. 수개월 동안 괴테와 교제하며 색채론에 관해서 연구하고 토론했고 괴테는 연구에 필요한 지원을 많이 해주었다. 괴테는 가끔 쇼펜하우어를 자기 집에 초대해 다양한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었다. 바이마르의 공공도서관에서 아시아 관련 잡지를 읽고 탐구하기 시작했다.


1814. 바이마르의 공공도서관에서 <우파니샤드>의 라틴어 번역본 <우프네카트>를 읽고 탐구

어머니와 쇼펜하우어는 심각한 갈등을 겪었고 이 일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나 편지교류는 가끔했다.


1816. 괴테와 색채론에 관해 교류하여 얻은 결실인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가 발표

이 논문에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실험을 토대로 뉴턴의 색채론과 괴테의 색채론을 비판하기도 했다. 괴테는 제자에게 비판받은 이 일을 베를린의 친구 슐츠에게 편지로 알렸고 약간 언짢았으나 쇼펜하우어를 대견스러워했다.


1818. 일생의 역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성

자신의 책이 역사적 의의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던 쇼펜하우어는 1년 동안 100권밖에 팔리지 않자 자신의 책을 몰라보고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동시대 교수들에 대한 증오심이 차올랐다. 쇼펜하우어는 괴테의 며느리(오틸리에)와 친분이 있던 자기 여동생의 편지를 통해 괴테가 이 책을 만족스럽게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1819. 베를린대학교 (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 강사직을 지원.

헤겔의 강의 시간과 같은 시간에 강의할 것을 희망했다.


1820. 채용 여부가 결정되는 시범 강의에서 통과.

당시 50살이었던 노련한 헤겔이 쇼펜하우어와 강의 중에 약간 논쟁했다. 강의 계획은 1820~1822, 1826~1831년까지 수립돼 있었지만 인기가 없어서 한 학기만에 끝남. 이후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헤겔, 피히테같은 강단학자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고 몽상적인 이론을 퍼트려서 대중을 속여먹는 저열한 사기꾼, 대중들의 두뇌를 해치는 넌센스 삼류작가, '철저히 무능하고 간사한 대학교수 패거리'의 두목이라며 비난했다. 헤겔의 이론은 당대의 지배이념으로 군림하며 정치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철학이라는 것을 대학교에서 강의한다는 것 자체가 부적합하다고 여겼고 교수들의 파벌 자체를 증오했다. 


1822.이탈리아 여행

이탈리아의 문화, 예술, 환경을 경험하고 이에 대해서 배우고 기록했다.


1823. 여행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옴.

여러 질병과 청각장애를 겪었는데 가장 울적한 시기를 보냈다. 뮌헨에서 겨울을 보냈다.


1824. 가슈타인(스위스), 만하임, 드레스덴에서 체류. 


1825. 베를린으로 돌아와 우울한 나날 속에서 스페인어를 학습

번역가로서 스페인어책을 번역하기도 함. 언어능력만큼은 나날이 좋아졌는데 예전에 익힌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외에 스페인어에도 매우 익숙해졌다.


1831. 이 해에 콜레라가 베를린에 퍼지자, 베를린을 떠나서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1833. 프랑크푸르트에 제대로 정착

유행이 지난 옷을 항상 입고 다녔으며 애완견을 데리고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했고 혼잣말로 이상한 소리를 하기도 하여 프랑크푸르트 주민들의 희한한 구경거리가 됨. 쇼펜하우어의 저서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 쇼펜하우어는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밖에 나돌아다니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쯤에 쇼펜하우어는 여동생과 어머니와 편지교류를 했고 작품활동으로 나날을 보내던 어머니는 아들을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다.


1835.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세상을 떠난 괴테를 위해 기념비 건립 계획을 세웠다.

쇼펜하우어는 당국에 괴테 기념비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했다. 인류를 위해 온몸으로 활동한 정치인들, 군인들, 개혁자들같은 위인들을 기념하려면 전신상으로 해야하지만 머리를 써서 기여한 문학가, 철학자, 과학자들을 기념하려면 흉상을 제작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완성된 괴테의 전신상 기념비는 매우 볼품없었고 훗날 미술사학자 프란츠는 이 기념비에 대해 '국가적 재앙'이라는 혹평을 내렸다.


1836. 자연과학이 증명해낸 것과 자신의 학설이 일치한다는 생각을 반영한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를 출판. 매우 꾸준히 학문에 매진했다.


1837. 쇼펜하우어는 <순수이성비판> A판(1판)을 B(2판)판보다 중시하여 칸트전집 출판에 개입했다.

칸트전집 출판에 관여한 로젠크란츠 교수는 쇼펜하우어의 건의사항을 받아들여 1판 원고를 실어 출판했다.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의 현상논문 모집에 응모하기로 결정함.


1838. 모친 요한나 쇼펜하우어가 72살의 나이로 사망

덴마크 왕립 학술원의 현상논문 모집 공고를 보고 응모하기로 결정함.


1839. 현상논문 <인간의지의 자유에 관하여>를 가지고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으로부터 수상


1840. 현상논문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를 가지고 덴마크 왕립 학술원에 단독으로 지원

학술원은 '이 시대의 대단한 철학자들'인 헤겔, 피히테 등을 비난했다는 등의 이유로 부당한 판정을 했고 수상하지 못함. 이후 쇼펜하우어는 '하찮은 판정'이라 취급했고 이 판정에 반론하는 글을 추가하여 책으로 출판했다. 헤겔을 심각하게 비난한 것은 인정하지만 헤겔이 '대단한' 철학자라는 것은 인정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1841. 두 현상논문을 묶어서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문제>를 출판.


1842. 여동생 아델레를 20년만에 만남.


1844.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판이 완성됨. 제1판의 재판과 함께 출판


1845. <여록과 보유(Parerga und Paralipomena)>를 쓰기 시작함.


1846.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가 쇼펜하우어를 만나 제자로 지냈는데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의 열혈 추종자다. 특히 법조인들이 열혈팬이 되었는데 이들은 <관념론의 잘못된 근거>에 "세계가 후회의 눈물을 떨구며 다시 한번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새길 날이 올 것"라고 썼다. 쇼펜하우어는 판사 요하네스 베카라는 사람이 자신의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 있으나 그것을 글로 쓰지 않았다며 아쉬운 마음을 드러냄.


1847.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의 개정판을 출간.

이 책에서 번역을 비판하며 가급적 해설서도 참고하지말고 그 나라 언어를 배워서 원서를 볼 것을 강조한다.


1849. 여동생을 마지막으로 만남. 여동생 아델레가 사망


1851.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부록'이라 할 수 있는 <여록과 보유>를 수 년간 집필한 끝에 출간

출판사의 암울한 예상과는 달리 이 작품은 얼마못가 쇼펜하우어의 책들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고 많이 팔려나갔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젊은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다.


1853. 영국의 독일어책 번역가인 존 옥센포드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웨스트 민스터 리뷰'에 소개하여 최초로 영국에 쇼펜하우어를 알림. 독일의 여성 언론인 린트나가 이를 다시 독일어로 번역하여 베를린의 포스신문에 발표하였다.


1854.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개정판을 출간

이 책에서도 쇼펜하우어는 헤겔과 헤겔의 '교수 파벌' 때문에 독일 철학계가 오염되었다고 엄청난 비판을 하며 대학교에서 철학을 배우려는 것은 인생낭비에 불과하니 자신의 사상과 칸트의 사상을 공부하라는 충고를 한다.

 

이 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난 40여년 간 독일에서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사기극을 사람들이 눈치챘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칸트 이후에 등장한 간사한 사기꾼들이 써낸 철학서적들과 한심한 논쟁들을 통해 하나의 진리라도 밝혀졌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1855. 라이프치히 대학의 철학과가 '쇼펜하우어 철학 원리에 대한 해명과 비판'이라는 현상 과제를 제시함. 여러 대학에서 쇼펜하우어의 사상 관련 강의가 개설되기 시작함.


1857. 쇼펜하우어에 대한 강의가 본대학교와 브레슬라우대학교에 개설

쇼펜하우어의 몇몇 책이 영국, 프랑스에 번역됨. 쇼펜하우어는 이 시절의 심정을 시적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이제 여정의 목적지에 지쳐 서 있다. 지친 머리는 월계관을 쓰고 있기도 힘들구나. 그래도 내가 했던 일을 기쁘게 돌아보는 것은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

 

1858. 쇼펜하우어 70살 생일 파티.

유럽 각지에서 쇼펜하우어를 만나기 위해 손님들이 찾아왔다. 베를린 왕립학술원에서 쇼펜하우어를 뒤늦게 회원으로 추대하고자 했지만 쇼펜하우어는 나이가 많다는 등의 이유로 거절했다.


1859.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판이 출간됨.


1860. 금요일 아침, 폐렴 증상을 겪었고 프랑크푸르트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사망. 

가정부는 항상 그랬듯이 집안을 환기시키느라 창문을 열어놓고 집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몇 분쯤 지나서 거실로 들어온 주치의는 소파에 등을 기대앉아 차분한 표정으로 죽어있는 쇼펜하우어를 발견했다. 

 

 

 

 

철학과 영향

 

철학분야 보다도 그 외의 과학분야, 예술분야에 더욱 큰 영향을 끼쳤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나 랄프 왈도 에머슨은 자신의 저서에 쇼펜하우어의 글을 인용했고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틀에 박힌 것을 혐오하는 개성이 중요하다고 강변했고 에머슨은 불교와 우파니샤드에 관심이 많아졌다.

 

↓생태주의자 소로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자신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한 답변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에게 무관심했으므로 바그너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몰랐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독일의 독보적 예술가 바그너

 

1854. 바그너의 친구이자 시인은 헤르베크는 그에게 쇼펜하우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추천해주었다. 바그너는 이것을 한 번 읽었고 감동받았다. 바그너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1년 동안 4번이나 통독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첼리스트이며 지휘자인 장한나는 음악가임에도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인터뷰에서 특히 쇼펜하우어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말했다.

 

↓장한나 : blogsabo.ahnlab.com/1172

 

정신분석학 창시자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기초에 해당하는 '억압'에 대해서 자신보다 먼저 쇼펜하우어가 잘 설명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근대 심리학자들에게 큰 영감을 선사했으며 심리학이 정식 학문으로서 자리잡기 전에 심리학적인 주장을 철학서적에서 펼쳤던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물을 산소와 수소로 분해한 라부아지에의 작업이 화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면 매우 오랜 세월 동안 분석되기 어려웠던 "자아 혹은 영혼"이라 불리는 것을 이질적인 두 가지 성분[의지와 지성]으로 분해하는 작업은 철학의 발전에 기여한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카를 융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헤겔의 거만한 문체보다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탐구한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카를 융

 

"헤겔은 난해하고 거만한 문체로 나를 겁먹게 해서 나는 노골적인 불신감으로 헤겔을 대했다. 헤겔은 마치 자신의 언어구조 속에 갇혀 그 감옥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몸짓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의 탐구가 가져다 준 가장 큰 결실은 쇼펜하우어였다. 쇼펜하우어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주목하지 않는 것 같았다."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분야는 문학계일 것이다.

 

러시아 소설가인 톨스토이, 이반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에밀 졸라,

독일 작가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

영미권 작가인 토마스 하디, 조지프 콘래드

위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창작에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인정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보면 불교적 색채가 강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두고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앙드레 지드는 자서전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앙드레지드의 1920년도 모습

 

"나는 쇼펜하우어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표현할 수 없는 기분으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자세히 읽어나갔고 자주 읽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나의 주의를 뺏지 못할 정도로 집중해서 읽었다. 스피노자나 니체같은 철학자들의 책도 읽었다. 내가 철학에 빠진 계기는 쇼펜하우어 덕분이며 오로지 쇼펜하우어 덕분이었다. 쇼펜하우어보다 헤겔을 더 좋아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은 황당한 일이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와 토마스 하디의 '테스' 등의 소설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유일하게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을 집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를 탈고하기 직전인 1869년 여름에 자신의 친구이자 쇼펜하우어 책을 번역한 아파나시 페트(본명:페트 센신)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Lev Tolstoy in Yasnaya Polyana", 1908, the first color photo portrait in Russia.

 

"이번 여름에 내가 뭘 했는지 알고계십니까? 나는 쇼펜하우어를 읽으며 강력한 기쁨을, 여태껏 한 번도 몰랐던 감동을 만끽했습니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모든 책을 모조리 구해서 읽었고 자주 읽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강의를 수강한 여느 학생도 내가 이번 여름에 발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배우지 못했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앞으로 나의 이런 의견이 언제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쇼펜하우어야말로 모든 인간들 중에 위대한 천재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당신은 쇼펜하우어가 철학적 주제들을 다룬 무언가를 썼다고 말해주셨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그것은 경이롭고도 생생하게 성찰되는 온전한 세계입니다. 나는 벌써부터 쇼펜하우어의 글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함께 번역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쇼펜하우어의 책을 많이 읽는 나는 어째서 아직도 쇼펜하우어가 그토록 세상 사람들에게 덜 알려졌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 이유란 아마도, 쇼펜하우어가 토로했듯이 세계에는 하찮은 인간들로 가득하기 때문이겠지요."

단편 작가로 유명한 프랑스의 모파상, 

러시아의 안톤 체호프, 

영국의 윌리엄 서머싯 몸,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

등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다.

 

문학가들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20세기에도 지속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은 안톤 체호프의 희곡에 많이 나타났는데, 체호프 이후에도

조지 버나드 쇼,

루이지 피란델로,

사무엘 베케트

등의 희곡 작품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예술 분야에서 이 정도로 이야기될 수 있는 철학자는 별로 없다. 예술,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칼 마르크스조차도 쇼펜하우어에 견줄 수는 없다.

 

당연히 쇼펜하우어는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이 철학자가 된 계기는 쇼펜하우어 때문이라고 말했다. 젊은 시절에 니체는 책방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 책을 발견하여 읽고 철학자가 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다음과 같이 쇼펜하우어를 평가한다.

 

↓Friedrich Nietzsche(1844-1900) : 우측은 1861년 모습


"오늘날 문화가 이토록 천박하지고 황폐해지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기운찬 줄기와 가지를 내뻗을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뿌리 하나라도, 비옥하고 건강한 토양 한 줌이라도 찾으려고 헛되이 애쓴다. 그러나 도처에는 먼지와 모래뿐이니 모든 것은 마비되고 탈진해서 죽어간다. 이런 상태에서 마음 한 자락 둘데 없이 고독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자기상징은 뒤러가 그려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죽음과 악마와 동행하는 무장 기사'이다. 무쇠처럼 굳센 눈빛과 철갑옷으로 무장한 이 기사는 자신의 끔찍한 동행자들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희망도 품지 않으면서 자신의 말을 타고, 자신을 따르는 개와 함께 험난한 길을 혼자서 고독하게 걸을 줄 안다. 뒤러(미술가)가 묘사한 이 기사가 바로 우리의 쇼펜하우어와 같다. 그는 모든 희망을 잃고도 진리를 추구했다."

또한 프리드리히 니체는 1888년에 이 시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그가 가르친 것은 지나갔으나 그가 살았던 것은 남으리라. 이 사람을 보라. 그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노라"

 

19세기 초반의 일부 철학 교사들은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탐구하려 하지 않았다.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시대에 속하는 19세기 후반에는 가장 유명하고도 영향력 있는 철학자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쇼펜하우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20세기 초의 모든 철학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인 비트겐슈타인에게 명백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1차세계대전에 참전한 시절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는데 동료들의 성향, 생각, 농담, 여자 얘기 등에 동조하지 않았고 이런 쓰레기같은 동료들의 행태보다 더 싫은 것이 없다고 회고했다. 오히려 방공호에서 쇼펜하우어의 책이나 열심히 읽고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을 고민했다고 한다.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는 칼 포퍼는 자신의 책 이름을 짓는 일에 쇼펜하우어가 지은 이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 여러 책을 읽다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만났는데 칸트의 글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쇼펜하우어의 여러 저서들을 읽었고 그 덕분에 칸트의 책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은 자신이 태어나서 최초로 진지하게 읽고 공부한 두꺼운 철학서적이라고 말했다. 

 

↓Karl Raimund Popper : Karl Popper in the 1980's.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사위이자 아인슈타인의 전기 작가인 루돌프 케이저는 1920년대 후반 아인슈타인의 연구실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마이클 패러데이, 쇼펜하우어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젊은시절부터 칸트나 쇼펜하우어같은 철학자의 책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

 

 

저서 : 원서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Ü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

 

 철학 박사 논문. 인식론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 책에서 쇼펜하우어가 의도하는 것은 칸트의 이성비판이 이룬 결과가 헤겔같은 철학교수들에 의해 왜곡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그리고 당대의 유행하던 철학사조를 강력히 비판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오류를 범한 점을 지적하며 칸트의 오류를 보완하는 자신의 이론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자신의 철학적 의도를 이 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I, II.

 

쇼펜하우어의 철학 주저. 인식론, 형이상학, 미학, 윤리학 네 가지 주제를 다룬다. 고전으로 자리잡은 이 책은 쇼펜하우어가 청춘을 바쳐서 만들어낸 작품이고 쇼펜하우어는 이 책을 "일시적이고 헛된 이념을 좇아 사라져가는 자기 세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후손들과 인류를 위해" 썼다며 대담한 선언을 했다. 서양 근대철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 책은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사실 번역으로는 제대로 읽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의지'라는 개념이 오해받거나 외면받았다.

 


《윤리학의 두 가지의 근본 문제》

Die beiden Grundproblemeder Ethik

 

'인간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이 두 논문을 묶어 출판된 것임.

 


《여록과 보유》

Parerga und Paralipomena

 

한국에서 '인생론' 등의 이름을 달고 일부가 번역되어 출판되는 책이다. '소품과 부록' 이라고 불리기도 함. 외국에서도 "삶의 지혜" 라는 식의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하며 소책자나 편역본으로 주로 출판되고 있다. 온갖 유머와 문학적 재치가 돋보이고 인생에 대한 격언이 쇼펜하우어 특유의 명쾌한 문체로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독일어권에서 쇼펜하우어의 문장은 최고급 산문이자 탁월한 문학적 글쓰기로 평가받는다. 아인슈타인도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독일어 글쓰기의 진수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

(Über das Sehen und die Farben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Ueber den Willen in der Natur

 

당대 자연과학의 연구 성과를 빠짐없이 기술했고 그 성과를 철학과 연결시킨 최초의 책으로 평가받는다.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칸트의 인간학이나 프리드리히 프리스의 인간학도 이루지 못한 사유의 인간학적 전회가 이 책에서 일어났다고 평가한다. 

 


《토론의 법칙》

Der handschriftliche Nachlass

쇼펜하우어가 남긴 방대한 유고 중 일부이며 미발표작이었다. 쇼펜하우어 사후에 제자인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가 편집하여 출판했다. 한국어 제목은 출판사 임의로 지었음

 

이 책에서도 쇼펜하우어는 헤겔을 비난하며 인격이 저열한 사이비철학자 등의 간사한 주장 방식을 간파하는 법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했다. "실제 토론에서 상대의 터무니없는 주장 방식을 간파하고 그것을 물리칠 수 있다" 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국내에는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토론의 법칙' 등의 제목을 달고 출판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유고집은 분량이 꽤 상당하며 아르투르 휩셔가 편집하여 총 5권으로 출판한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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