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충원[대전/서울]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과 상세
- ■ WORLD/● 세상이야기
- 2020. 9. 9.
✔️국립서울현충원과 국립대전현충원의 각 친일반민족행위자 정리
현충원에 애국과 정반대되는 매국 활동을 한 이들이 안장되어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ㅋㅋㅋㅋㅋ 이다. 과연 '친일과오'와 '구국공훈'을 단칼에 분리할 수 있을까.
2020.06.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된 인물 가운데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이들은 총 12명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로 범위를 넓히면 김창룡 등 총 68명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백선엽 대전현충원 안장 반대 기자회견 ⓒ중도일보 링크
국립서울현충원 친일반민족행위자
김찬규/김백일
↓대한민국 육군 장성 시절 김백일 ⓒ 전쟁기념관
■ 1937. 봉천군관학교를 5기로 졸업하고 만주군 보병 소위로 임관.
■ 1938. 강재호, 신현준, 송석하, 마동악 등과 함께 간도특설대 창설 멤버로 참여하여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복무하면서 만주 지역의 항일무장세력을 진압하는 활동을 지휘했다.
■ 간도특설대에서 중대장으로 활동하며 일본 제국 정부로부터 서보장을 수여받았다.
광복 후
■ 월남하여 김백일로 개명.
■ 1946. 남조선국방경비대 제3연대를 창설하여 연대장에 올랐다.
■ 1948.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전라남도 광주에 소재한 대한민국 국군 제5여단의 여단장 대리로 임명되어 반란을 진압
■ 1949. 제6여단 여단장에 임명
■ 1950.01. 제3사단장에 임명, 4월에는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에 보임
■ 6.25 전쟁 당시 공석이던 작전참모부장까지 겸임
■ 1950.10. 육군 소장으로 진급
■ 1951. 항공기 사고로 사망. 육군 중장으로 추서되고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 1966.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
김홍준
■ 1937.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간도특설대의 기박련 연장(連長)으로 근무.
■ 1944.02. 열하성 유수림자 일대에서 팔로군을 토벌하면서 그가 속한 부대가 행한 잔인한 행적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 마을을 수사하는 중 XX연장과 그의 통신병이 한 팔로군이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총을 쏘아 죽였다. 연장은 군도로 팔로군의 머리를 벤 후 그 머리를 유수림자에 가지고 가서 철가마에 삶아냈다. 그 연장은 팔로군의 두골(머리뼈)을 기념으로 남겨두었다.
■ 간도특설대 복무 중 경운장 6위·5위 훈장을 수훈했다.
■ 1967. 국립서울현충원에 현충탑안의 위패 봉안실에 위패가 봉안
■ 2015. 부인이 사망하여 부부위패봉안당에 위패가 이장
■ 친일반민족행위자중 유일하게 위패로 안장되어있다.
신응균
■ 아버지 신태영과 함께 부자지간 친일파. 일본군 장교인 신태영의 아들
■ 일본 육군 포병으로서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 광복 후 한국 국방부 차관까지 지냈다.
■ 1940.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53기 졸업. 일본 제국 육군에 임관.
■ 1943. 일본 육군과학교를 졸업. 태평양 전쟁에 중포부대 소속으로 참전.
해방 후
■ 종전 당시에는 육군 소좌
■ 1946. 주둔하고 있던 오키나와 섬의 산 속에서 숨어지내다가 귀국.
■ 미군정 시기에 대한민국 국군 장교
■ 한국 포병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포병사령관 시절에는 박정희의 상관이기도 했다.
■ 1959. 중장으로 예편
■ 1959. 주 터키대사에 임명
■ 1960. 국방부차관보에 임명
■ 1961. 국방부차관, 7월에 주서독대사에 임명
■ 1965. 외교안보연구원 원장
■ 1966. 과학기술연구소 부소장
■ 1970.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해 초대 소장
■ 1976. 한국경영과학회의 전신인 운영과학회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
신태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공인 친일파.
■ 1914.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 나고야 제3사단 보병 제33연대에서 복역
■ 1918. 중위로 진급하고, 시베리아 내전에 참전
■ 1924. 전후 ~ 1933년경까지 근무하며 소좌까지 진급
■ 1942. 용산정차장 사령관을 역임하는데, 이 과정에서 경성일보에 올린 수기에 "조선인들은 한시바삐 제국의 신민이 되어 동아시아를 개척해야 한다. 내 첫 출진의 목표는 야스쿠니 신사다."라는 문구가 있다. 즉, 야스쿠니 신사에 안장되는 것이 목표였을 정도로 골수 친일파였다.
■ 일본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으로는 이응준(李應俊)·홍사익(洪思翊)·김준원(金埈元)·이대영(李大永)·유승렬(劉升烈)·박승훈(朴勝勳)·이청천(李靑天)·안병범(安秉範) 등이 있다.
광복 이후
■ 1949. 육군참모총장
■ 1952. 1월 중장으로 승진, 3월부터는 제4대 국방부 장관이 되었다.
■ 1959. 사망
■ 1974.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
■ 초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응준과 함께 장군2묘역에 있다.
그런 이력에도 불구하고 국립서울현충원의 묘비에는 아래와 같이 왜곡 서술 되어 있다.
"개화의 선구자로 호국의 간성이었고, 강직과 청렴으로 시대의 등불이었으며, 덕과 지용으로 국군을 세워 기르셨으니 뜻의 굳으심이 눈바람에 푸르른 청송이시오. 덕의 굳으심이 뭇 봉우리 우뚝한 태산이시라. 높은 뜻 해와 함께 이 땅 위에 머무르시고 빛난 달과 함께 어둠 속의 등불 되시어 조국을 길이길이 비치오소서. 비치오소서."
이응준
■ 일본군 고급장교로 복무(일본군 대좌), 일제 학병 강연과 지지, 팔로군 토벌, 시베리아 출병
■ 초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 1914. 일본육군사관학교를 26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
■ 1918. 일본 파견군 사령부에 배속 : 그곳에 살고 있는 조선인을 통해 러시아인, 중국인, 조선인 공산주의자를 파악하고 대민 정탐 활동 업무를 담당했다.
■ 1925. 곽송령(궈쑹링)사건이 발생하자 펑톈에서 현지 경비 업무를 담당.
■ 1933. 일본군 육군 소좌로서 조선군 제20사단 제79연대 부관으로 근무
■ 1934. 조선군 제20사단 제79연대 대대장으로 근무.
■ 1935.07 일본군 장교로 장기간 복무한 공적을 인정받아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 1936. 중령으로 진급
■ 1939.01.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 1941. 대좌로 진급했고 학병 홍보 등을 했다. 홍보의 내용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목숨을 바쳐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자는 선동. 이응준은 징병제 실시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와 적극적인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방하면서 인력 동원에 앞장섰다.
해방 후
■ 1946. 대령으로 특별임관
■ 1948. 대한민국 육군 초대 육군참모총장
■ 1952. 육군대학총장. 모슬포 제1훈련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중장으로 진급했
■ 1955. 동계급으로 예편.
■ 체신부(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 한국반공연맹 이사장(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 1985.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종찬
■ 1935. 일본 육군사관학교 예과를 졸업
■ 1937년 6월 본과를 제49기로 졸업. 11월 일본군 공병 소위로 임관.
■ 1937.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 일대로 파견되어 소대장으로 참전.
■ 1938. 중위로 진급.
■ 1941.03. 대위 진급.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勳六等)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 1942.02. 조선인 장교로 유일하게 공5급(功五級) 욱6등(旭六等) 금치훈장(金鵄勳章)을 받았다.
■ 1942. 도쿄의 육군포공학교(陸軍砲工學校)에서 수학
■ 1943. 7월부터는 일본군 제17군 남해지대 소속의 독립공병 제15연대에서 복무
■ 1944. 독립공병 제15연대장 대리로 복무.
이러한 친일 행적에도 불구 이들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 및 반성했다고 하며, 정부 수립 후에는 독재 정권에 순응하지 않은 고위급 군인이기도 하다.
백낙준
■ 1927.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
■ 1929.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으로 참여
■ 1931. 영국 왕실아세아학회 한국지부 이사로 위촉
■ 1940.01. 일본기원2600년봉축신도대회에서 「총후 기독교인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
■ 1940. 경성노회 소속 목사로 연희전문학교에서 시무
■ 1941.01. 조선예수교 장로회 포교자
■ 1941.08. 조선예수교 장로교도 비행기기부회 부회장으로 임명. 조선임전대책협의회 결성에 참여.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
■ 1942.02. 국민총력 조선예수교 장로회총회연맹이 주최한 지방시국강연회 연사로 선정되어 경의선 지역을 순회강연
■ 1942.04. 기독교 각파의 합동기관지인 기독교신문협회 이사 및 『기독교신문』 편집위원으로 임명되면서 일제침략정책에 부응한 편집과 황민화정책 및 전쟁협력을 강조하는 설교와 사설을 집필하였다.
■ 1942.04. 피어선기념성경학원 유지재단 이사회 이사 및 회계 실행위원으로 선임.
■ 1942.06. 조선예수장로회 총회장 최지화(崔志化), 교육부 총무 정인과·이용설(李容卨)·오문환(吳文煥) 등과 함께 조선군사령부에 육군환자용 자동차 2대분인 2만 3천원의 기부금을 바쳤다.
■ 1942.09. 조선예수교장로회 비행기기부회에서 제공한 돈으로 구입한 일본해군전투기 헌납기념식에 참석
■ 1942.11. 경성경기합동노회 규칙부원으로 임명
■ 1943.09. 재단법인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유지재단의 이사에 재선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내선일체 지지 및 학병 모집 선동, 신사참배 장려 등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특히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엄청나게 많은 기고를 하였다. 태평양 전쟁을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성전이라고 했을 정도.
해방 후
■ 1946. 연희대학교(현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 1950.05. 제2대 문교부(현 대한민국 교육부)장관을 지냈다.
■ 1950.11. 국무총리에 잠깐 임명되었으나 단명 국무총리였다.
■ 1957. 연희대와 세브란스의대를 통합해 연세대설립하여 초대총장 취임해 정년퇴임하였다.
■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 참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윤보선이 아직 대통령으로 취임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입법부 수장의 자격으로 대통령 권한을 닷새 동안 대행하였다.
■ 1961. 연세대학교 명예총장
■ 1970. 반(反)유신운동에 뛰어들어 민주화운동에 투신도 하였다.
■ 1969. 국토통일원 고문
■ 1980. 국정자문회의 운영위원
■ 1970. 광복절에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 90세로 사망, 사회장으로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다.
일제강점기 말기의 행적 때문에 이광수, 최남선, 김활란, 김성수, 유진오, 모윤숙 등과 더불어 전시체제기 대표적인 친일파라는 비판을 듣는다.
국립대전현충원 친일반민족행위자
↓장군1묘역에 있는 친일 부역자들, 백선엽은 장군2묘역에 있다.
김석범
↓ⓒ나무위키 : 출처
■ 1934. 만주 신경사범학교 졸업
■ 1937. 봉천군관학교 5기생으로 졸업
■ 1940. 석희봉과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54기로 졸업했다.
■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창설되어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에서 정보반 책임자로 활동 : 이 정보반의 목적은 팔로군, 항일 지하공작원, 민병의 활동과 주민들의 사상 동태를 정찰하여 항일군민을 소탕하거나 체포하고 학살하기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일명 특수부대 특수요원. 정보반원은 각 중대에서 13명의 정예분자를 선발하여 조직되었으며, 정보 수집을 넘어 항일무장세력이나 민간인을 직접 체포, 심문하고 학살하는 일까지 담당하였다.
■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6위 주국장(柱國章)을 수여받았다.
■ 1945.08 신징(新京)으로 가서 정일권의 뒤를 이어 신징보안사령부 사령관을 맡았다.
■ 1946. 조선해안경비대 견습사관을 거쳐 장교로 임관한 뒤 교두, 사령관, 참모장을 지냈다.
■ 1953. 제2대 해병대사령관
■ 1958. 김정렬 국방부장관 특별보좌관
■ 1960. 해병대 중장 예편.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부회장, 성우회 부회장
■ 1998. 사망하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
6.25 전쟁 당시 중국에 있던 많은 한국인들이 대한민국으로 도망간 친일파들을 잡기 위해 중공군으로 참전했는데, 이들이 많이 했던 말이 바로 "정일권, 김석범, 김일로 잡으러 가자"였다.
백홍석
↓ⓒ 재향군인회 홈페이지
■ 1909.09. 대한제국 무관학교가 폐지되자 일본으로 유학
■ 1911.09. 일본 중앙유년학교 예과를 졸업했고 본과 1학년에 입학
■ 1915.05.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
■ 일본 오카야마 소재 제17사단 보병 제54연대 소속으로 복무했다.
■ 1919.04. 일본 제국 육군 보병 중위로 임명
■ 1937.07. 평양 소재 조선군(조선 주둔 일본군) 제20사단 77연대 소속으로 복무
■ 1939.04. 육군 보병 소좌와 신의주지구 방공사령관 역임
■ 1940.03. 평안북도 방공위원회 위원 역임
■ 1944.04. 예비역 보병 중좌와 경성 육군사령부 과장을 역임하는 동안 일제의 조선인 병력 동원을 담당했다.
광복 이후
■ 1946. 통위부 자문역을 역임
■ 1948. 대한민국 육군 특별부대사령관으로 임명
■ 1950. 대한민국 국방부 병무국장
■ 1951. 서울지구 병사구사령관
■ 1953. 대한민국 육군본부 병무감
■ 1954. 동부지구 경비사령관
■ 1955. 대한민국 육군 제33예비사단(현재의 제17보병사단) 단장
■ 1955. 육군 소장 특진과 함께 육군 소장 예편
■ 1952.02.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초대 회장
■ 사망 후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있다. 장군1-176
송석하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에서 1등으로 졸업 ⓒwiki commons
■ 1937~1945 만주국 봉천군관학교 제5기 졸업. 만주국 육군 상위 (최종 계급)
■ 만주군 소위로 임관 후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하며 항일무장세력을 진압.
■ 같은 만주군 출신 방원철은 송석하가 이 특설 부대의 창설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 1946.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제2기
■ 1948. 제2연대 부연대장
■ 1949.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
■ 1950. 제20사단장
■ 1961.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한국국방연구원 원장
■ 1962. 소장 예편
■ 1963. 민주공화당 중앙상임위원. 국가안전보장이사회 상임위원 겸 사무국장.
■ 1969. 재향군인회 안보위원장
■ 1999. 사망하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
신현준
↓신현준 ⓒwiki
■ 우다카와 요시히토(宇田川義人)
■ 1936.04. 일본군 장교의 도움으로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에 입학
■ 졸업 후에는 만주군 대위로 근무했으며, 이때 박정희보다 상관으로 같은 부대에 있었다.
박정희를 비롯하여, 정일권, 백선엽, 이한림, 김석범, 원용덕, 김창룡 등과 함께 국군 내의 대표적인 만주군 인맥이었다.
만주군 복무만으로도 이미 '일제 부역'이라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그가 항일 독립운동가들과 그 항일조직들을 소탕하고 잡아 죽이는 일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대인 간도특설대 간부였고, 그것도 창설 멤버였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해병대의 창설 지휘관이자 초대 사령관인 신현준은 간도 특설대의 창설 간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사실은 대한민국 해병대의 부끄러운 역사.
광복 후
■ 1946. 조선해안경비대에 입대한 뒤 대한민국 해군 중위로 임관. 인천기지사령관
■ 1948. 진해특설기지 참모장
■ 1949. 제1대 해병대사령관 : 해병대 창설 초대 사령관.
■ 1961. 국방차관보·중장 예편(5.16 군사정변 후)
■ 1970. 세계반공연맹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 2007. 사망.
김창룡
■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관동군 헌병 소속
■ 항일 무장세력을 토벌
■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데 앞장섰던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의 군인 버전
■ 1941.04. 일본 관동군 소속 헌병 교습소에 입소.
■ 1941.10. 일본군 헌병 보조원
■ 1943. 일제는 그의 활약으로 왕진리를 검거했을 뿐만 아니라 왕진리와 관련된 9개 항일 지하조직을 색출하고 50여 명을 검거했다 : 그의 활약에 탄복한 일제는 바로 헌병 오장(하사)으로 특진시켰다.
■ 1943.09.~1945.08.15. 일제 패망까지 무려 50여 개의 항일 조직을 적발했다.
광복 후
■ 소련군에게 친일부역 혐의로 체포당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탈출.
■ 친일 혐의로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거듭 탈출에 성공
■ 38선을 넘어 월남해 서울로 왔다.
■ 만주 일본군에서 안면이 있던 박기병(당시 3연대에서 소대장)을 만나 국방경비대 5연대 일반 사병으로 입대되었다.
■ 만주군 대위 출신 김백일의 추천으로 1947년 1월 조선경비사관학교 3기로 입교해 소위로 임관했다.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인물이 광복군 출신의 이성가 제1연대장(당시 소령). 우익 성향의 이성가는 제1연대 내의 공산주의자를 솎아내기 위해 김창룡을 연대 정보주임 보좌관으로 발탁하고 정보소대 지휘를 맡긴다. 여기서 김창룡은 그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이병주 소령을 비롯한 연대 내 좌익 장병들을 대거 색출해냈다. 이후 여순 반란 사건을 계기로 숙군 작업이 본격화되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면서 김창룡에게는 출세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나무위키의 김창룡 서술
여순사건 당시 숙군 및 김구 암살 관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더불어 대위로 진급. 8월 말 육군본부 정보국에 배속. 1948.10. 여순사건 직후 이승만은 대대적인 숙군을 지시했다. 1949.03.까지 방첩과는 불과 4개월 동안 1,500명에 달하는 이를 숙청했다. 짧은 시간 안에 실적 쌓기식 숙청이 되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증거보다 자백을 받아내는 식으로 심문을 했고, 고문이 혹독하게 가해졌다. 자백을 한 뒤에는 연루된 좌익 인물을 대라고 또 다시 고문이 이어졌다. 이 같은 방식으로 애매하게 숙청되는 인물이 많았다.
1949.07.까지 숙군은 이어져 4,749명이 처벌받았다.
1949. 짧은 시간 안에 뛰어난 실적을 올린 김창룡은 소령으로 승진.
1949.06. 육군 방첩대(CIC)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9.07. 중령으로 승진했다.
1998.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 죽은 뒤 관악산에 있다가 옮겼다.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한 배후로 가장 유력한 인물 : 안두희는 김구를 살해한 직후 경교장 주위에 있던 헌병들에게 체포됐다. 체포된 안두희가 끌려간 곳이 김창룡 앞이었다. 이때 김창룡은 안두희에게 "안 의사, 수고하셨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창룡은 이후 안두희를 끊임없이 챙겼다. 감옥에 있을 때 좋은 음식을 대접했고, 책 쓰는 것을 도와줬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김창룡은 안두희를 형무소에서 빼내 주었다. 안두희가 소위로 다시 임관할 때부터 대령으로 제대할 때까지 김창룡은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그래서 김구 암살의 배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양민학살 및 간첩 조작
1950.09.28. 이승만은 북한군에 점령당했던 서울을 수복하자마자 김창룡을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합동수사본부는 북한군이 수도권 지역을 점령하고 있을 당시 북한군에 협조한 '부역자'를 찾아내고 처벌하는 무시무시한 권한을 가졌다. 그뿐이 아니라 합동수사본부장은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정치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1950.10.~1951.05. 까지 엄청난 속도로 부역자를 처벌했다.
1950년 말까지 검거된 인원만 15만 3,825명, 자수한 인원 39만 7,090명으로 총 55만 915명이 부역 혐의를 받았다고 한다. 이 가운데 서울에서만 1,298명이 처형됐다.
이에 따라 실적을 중시한 김창룡의 부역자 처벌은 여론과 정치권의 거센 비판을 받아왔고 결국 합동수사본부는 1951년 5월 23일 해체된다. 김창룡은 이 시기 이승만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다. 이 과정에서 김창룡은 1950.10. 대령으로 승진하고 1951.05. 육군 특무부대 대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35세였다.
이후 대부분의 좌익들을 소탕했기에 빨갱이를 때려잡을 기회가 줄어들자 없는 빨갱이를 만들기 시작한다.
1951년 한 무리의 청년들이 상복을 입은 채 관을 메고 지리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특무부 대장 김창룡은 이들이 관 속에 총기를 숨겨 놓고 지리산 빨치산에게 가는 것을 붙잡았다고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기분이 좋아진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여러분들, 김창룡 대령을 자식처럼 사랑해 주세요"라고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그런 뒤 이승만은 국무회의장으로 김창룡을 불러들인 뒤 노획한 총기를 전시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는 김창룡이 벌인 숱한 조작 사건 중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최초의 '빨갱이 만들기 작전'은 1950년 10월 그가 군·검·경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취임한 직후 일어났다. 인민군 패잔병으로부터 빼앗은 무기를 삼각산 뒤편에 있던 주민들에게 쥐여주고 이들을 공산분자로 몰았고, 이들이 서울을 습격하려 한다고 꾸며 모두 죽인 사건이다. 이것이 소위 '삼각산 사건'이라 한다.
1952년 5월 24일 무장 북한군으로 보이는 일당이 임시수도 부산 금정산에 나타나 총격을 가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국군과 미군 병력이 밀집해 있는 임시수도 부산에 북한군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상 말이 안 되었는데, 사실 이 또한 김창룡이 조작한 사건이었다. 당시 김창룡은 대구형무소에 있는 무기수, 중형수들을 상대로 '큰 일을 치르고 나면 석방해 주겠다'라고 제안했다. 김창룡은 이 제안에 따른 형무소 재소자 7명을 북한군으로 꾸민 다음 부산 금정산에서 총격을 하도록 한 것이다. 물론 이들 7명은 순식간에 사살당했다.
하지만 김창룡의 공작에 힘입어 이승만은 다음날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5월 26일 야당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통째로 납치한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켰다. 이를 토대로 이승만은 재집권에 성공한다. 그런데 김창룡은 자신이 이 사건을 직접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김창룡의 직속상관 김종평(육군 정보국장)이 그가 부산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았다. 결국 공은 원용덕 헌병사령관 등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공을 빼앗긴 김창룡은 김종평에 원한을 품고 있었고 이는 또 다른 조작사건으로 만들어진다.
1953년 김창룡은 '동해안 반란 사건'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동해안 속초에 있는 1군단에 이승만이 방문하면, 이승만을 저격하고 김종평 육군 정보국장이 군 병력 1000명을 동원해 부산을 장악해 정부 요인을 처단한 다음 조봉암 국회부의장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엄청난 내용이었다. 나중에 군법회의에서 여러 증인들이 김창룡의 조작임을 증언하면서 사건은 커지지 않았지만, 김종평은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53년 5월 김창룡은 육군 준장이 됐고, 이때부터 김창룡은 간첩 조작과 함께 권력 투쟁에 직접 개입하게 된다.
가장 먼저 타겟이 된 이는 '정국은'이라는 사람이었다. 당시 가장 영향력이 강하던 연합신문과 동양통신의 양사 편집국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정국은은 이범석, 원용덕 등과 함께 이승만 정권의 외곽 세력인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 출신이었다. 김창룡은 족청과 대립 관계에 있었고, 김창룡은 이러한 족청을 밀어내기 위해 1953년 8월 31일 정국은을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 정국은이 체포된 지 10일 만에 내각에서 족청 계열 장관 3명이 동시에 파면되고, 곧 자유당에서 족청 계열 거물인사 8명이 제명됐다. 김창룡의 반대 세력이었던 족청은 순식간에 권력에서 이탈했다.
족청을 제거한 김창룡은 다음 타깃으로 반공검사로 유명한 오제도를 삼았다. 김창룡은 이승만에게 '오제도는 빨갱이입니다.'라고 보고했다. 이 사실을 듣자 오제도 또한 '아닙니다. 김창룡이 빨갱입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래서 김창룡의 오제도 검사 제거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박정희 역시 견제의 대상이었다. 1953년 박정희가 미국 유학을 떠나려 할 때 김창룡이 막았다. 당시 미국 유학을 다녀오면 그 이력이 쌓여 군대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박정희가 남로당에 있을 때 그를 잡아내고 심문한 사람이 바로 김창룡이었다. 김창룡으로서는 박정희의 출세를 막아야만 했다. 이렇듯 김창룡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일권과 상관인 강문봉 중장조차 그를 감당하지 못했다.
1954년 김창룡은 김도영이 야당 국회의원 신익희의 사주를 받아 논산 훈련병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한다는 혐의로 구속하기도 했다. 김도영은 4개월 뒤 풀려났지만, 김창룡 때문에 번번이 승진의 기회에서 누락됐고, 변변찮은 보직도 맡지 못했다.
1955년 1월 심지어 김창룡은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 당시 김창룡을 사람들은 '이승만의 오른팔', '이승만의 양자'라고 불렸다.
1955년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 역시 김창룡의 작품이었다. 김창룡은 1955년 과거 독립운동을 했던 나재하, 김병호, 민영수, 김재호, 김익중, 이범륜, 유성연, 김동혁, 김동훈에게 '이종태'라는 청년을 접근시켰다. 그는 이승만을 비판하면서 나재하 등에게 '이대로는 안 된다. 도탄에 빠진 국민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승만을 제거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이에 그들은 이종태에게 1955년 10월 3일 개천절 행사 때 수류탄을 터뜨려 이승만을 죽여달라고 부탁했으며 수류탄 등을 지원했다. 결국 당연하게도 이 음모는 거사 직전 특무대에 발각됐다.
그리고 이 사건을 납북된 조소앙이 암살 지령을 내렸다는 식으로 엮어서 한때 조소앙이 몸 담았던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정치인들도 제거하려 했다. 이 외에도 김수임 간첩사건 등 숱한 사건이 그의 손에 의해 조작돼 많은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55년 10월 김창룡의 횡포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정일권과 강문봉은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있는 진해에 직접 찾아갔다. 그들은 "김창룡을 다른 부대로 보내거나 차라리 미국 유학을 보내 달라"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의 요청을 거부한다. 이 소식을 들은 김창룡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김창룡은 때마침 터진 원면[14] 비리를 활용하려 했다. 당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원면을 받은 장성들이 이를 시장에 되팔아 1억 원 이상의 부당이익을 취해 자유당 고위층에 상납했다고 한다. 김창룡은 이를 가지고 자신을 탄핵한 정일권, 강문봉 등 군 장성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이기붕조차 김창룡에게 '그만 들춰라'고 경고했지만 김창룡은 멈추지 않았다.
1955년 11월, 일제 경찰 출신으로 고문의 달인인 노덕술 헌병사령부 범죄수사단장(중령)이 파면됐다. 노덕술 또한 김창룡과 마찬가지로 이승만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군수물자를 빼돌린 정황이 포착됐고, 언론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면서 파면되고 말았다. 이 사건도 김창룡이 잠재적 경쟁자가 될 수 있는 노덕술을 제거했다는 설이 우세하다.
권력투쟁 끝 암살
1956년 1월 30일 김창룡은 특무대 출신 4명(허태영 대령, 신초식, 송용고, 이유회)에게 암살된다. 특히 이 가운데 주범인 허태영은 1950년 6.25 전쟁 때 김창룡이 방첩대(CIC) 대장을 맡고 있는 동안 특무대 마산파견대를 이끌었다. 이후 특무대 대전파견대장을 지냈을 정도로 김창룡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허태영은 법정 진술에서 김창룡을 죽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평가
여순사건의 사례 때문에 숙군은 꼭 필요한 일이었으며, 당시 정황상 어느 정도 부작용을 감수하고 빨리 끝낼 수밖에 없었으나, 이 과정에 김창룡 개인의 권력욕이 개입해 억울한 피해자를 무수히 양산했다. 그래서 국군 원로들은 김창룡을 매우 싫어한다. 권력을 남용하고 군의 지휘계통을 무시한 데다 숙군 과정에서는 지나친 무리수로 억울한 희생자를 많이 만든 탓에 평가가 아주 좋지 않다.
하지만 뉴라이트 등 극우세력은 단순히 이 사람을 좋게 평가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그냥 찬양한다. 그의 무덤에 매 해 꽃도 바치고, 김창룡을 욕하는 건 종북 행위라고 우기는데, 심지어는 2011년 그의 불쏘시개 전기를 출간하기도 했다.
축구계 원로들 중에도 이 사람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들이 많다. 네이트 김현회 칼럼에 축구대회에서 횡포를 부린 일화들이 소개된 바 있다.
백선엽
■ 1941.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 9기 군관 후보생으로 입교
■ 1942. 보병 제28단에서 견습사관을 거쳐 소위로 임관. 자무쓰 부대에서 신병훈련소 소대장으로 근무
■ 1943년 2월에 간도특설대로 배치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1938년부터 당시 만주 지역에서 활약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김일성, 강건, 김광협, 최용건 등이 가담한 동북항일연군 및 팔로군 소속 게릴라 부대를 주로 상대하며 여러 차례의 잔혹한 토벌작전을 벌여 악명이 자자했다. 이 때문에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이 있는 백선엽도 당연히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고 있다.
광복 후 재임기간 경력
■ 제7대 육군참모총장 : 1952.07.23. ~ 1954.02.13.
■ 제10대 육군참모총장 : 1957.05.18. ~ 1959.02.22.
■ 제4대 합동참모의장 : 1959.02.26. ~ 1960.05.31.
■ 제19대 교통부 장관 : 1969.10.21. ~ 1971.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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