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와 동시대 희대의 바람둥이 자코모 카사노바
- ■ WORLD/● 화제의인물
- 2021. 1. 12.
바람둥이의 대명사 카사노바. 그가 남긴 유명한 어록은 다음과 같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여자를 위해 태어났다는 사명을 느꼈으므로 늘 사랑했고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내 전부를 걸었다."
"나는 여자들을 미친 듯이 사랑했다. 그러나 여인과 자유 중 하나를 고르자면 난 자유를 택할 것이다."
"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자유인으로서 나의 자유의지에 의해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그의 저서 《나의 인생 이야기(Histoire de ma vie)》 서문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 데 세인갈트
Giacomo Girolamo Casanova de Seingalt
동생인 프란체스코가 그린 그림.
● 1725.04.02. ~ 1798.06.04
● 스페인계 이탈리아인
● 이탈리아의 범죄자성범죄자
● 희대의 바람둥이
● 직업은 밤의황제. 성직자, 모험가, 시인, 소설가를 자칭
● 일반적으로 잘난 바람둥이의 대표격이자 난봉꾼의 대명사
● 난봉꾼 정도를 넘어 불법 매춘과 강간을 즐기고 사기 행각을 저질렀다
● 어린 여자를 학대하기도 하였다.
● 어린 소녀와 검열삭제하거나 그 나체를 보는걸 즐긴것도 있다.
● 15세에 수도원장, 16세에 법학박사, 그리고 의학, 화학, 수학에 박식
● 18세기 사람으론 드물게 통계학에 능통해 프랑스 국영 복권의 조직을 위탁받기도 했다.
● 그 이후 시인, 비단 제조 공장 운영, 염색 공장 운영, 바이올리니스트, 격투가, 역사가, 마술사, 엔지니어 등으로 활동했으며 프리드리히 대왕과 함께 음악에 맞춰 춤추는 분수를 가동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기도 했다.
카사노바는 그 무수한 여자들을 오직 자신의 매력과 화술로 유혹하지는 않았다. 그의 여성편력 중에는 금전이 얽힌 경우가 많았는데, 당장 자서전에서도 여자와 관계를 가진 후 '금화를 선물로 주었다'는 서술이 수도 없이 나온다. 값나가는 물건도 아닌 현찰을 준 것을 보통 '연인에게 준 선물'로 해석하지는 않으므로 명백히 매춘으로 볼 여지가 크다. 즉, 카사노바는 귀족 여자와는 사기성 연애 내지는 강간을 했고, 낮은 신분의 여자들과는 매춘을 했다.
작가 외의 다른 영역에서의 활동은 초라하다. 저서는 많지만 독창적이거나 획기적인 발상은 없다. 여러 분야에 두루 능통한 지식인이자 교양인이었지만 독립적인 업적이라 불릴 만한 성취를 이룬 분야는 없는 전형적인 딜레탕트였던 셈.
카사노바가 이탈리아에서 스페인, 프랑스, 영국, 러시아, 체코 등등 온 유럽을 떠돌아다녔는데, 한 나라에서 사고를 너무 많이 쳐서 맞아죽거나 감옥에 갈 지경이 되면 다른 나라로 튀어버린 것. 그러니 한번 갔던 나라는 다시 못 돌아가고 그러다보니 온 유럽을 떠돌게 된 것이다.
일생
1725.04.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출생
아버지는 희극배우 자에타노 주세페 카사노바
어머니 자네타는 유럽에서 꽤나 이름 있는 성악가였다.
동생 중 한 명인 프란체스코 카사노바는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가로 성공하게 된다. 위의 초상화는 그 동생이 그린 것이다.
1740.02. 15세에 수도원장이 된다.
성직에 입문, 베네치아의 대주교로부터 신품을 받았다. 동시에 파도바 대학에 다니며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 스페인어, 영어를 배우고 고전문학, 신학, 법학, 자연과학, 예능 등 다양한 지식을 섭렵하고 춤, 펜싱, 승마 등 교양과 카드 게임 등의 사교술을 익혔는데, 이때 배운 것들은 훗날 소위 '엘리트들'과의 교류에 유용하게 사용된다.
1742. 17세. 파도바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성직자 신분에도 여신도들을 꼬시는 등 일탈행위를 일삼았고 그를 둘러싼 구설수들이 나오자 교회에서 그를 쫓아냈다. 그리고 바람둥이 행각이 시작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으로 건너갔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화려한 언변과 재능으로 여자들을 유혹했는데, 이때 베네치아 귀족이자 상원의원이었던 마테오 조반니 브라가딘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더 거칠 것이 없어졌다. 가문빨 및 돈빨로 카사노바는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여행 중에 만난 모든 여자들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였다. 카사노바 자신의 회고록에 의하면 122명의 여자들을 안았다고.
한번은 베네치아에서 난교 파티를 열었는데 이때 수녀까지 끌여들였다가 카사노바를 탐탁치 않게 여긴 귀족층에서 그를 "이성을 유혹하는 이단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라는 죄목으로 체포했고 5년형을 선고받고 1년간 두칼레 궁전에 있는 피옴비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1756. 피옴비 감옥 탈옥에 성공.
탈옥할 때 '나를 가둘 때 내 동의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누구의 동의없이 탈출한다 '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삶을 살다갔다.
1757.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옛 친구의 도움으로 재정 전문가로 활약하며 루이 15세에게 복권 도입을 제안하기도 했다. 복권 에 당첨되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잘못된 사실이다. 그는 복권 사업소 5곳을 운영하며 막대한 수입을 벌여들였을 뿐이다. 재정적으로 넉넉해지자 또다시 여자들을 자신의 침실로 불러들였다. 그러던 중 실크 프린팅 사업에 실패하고 여자들과의 관계로 돈을 탕진하기에 이르자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렸고 이를 갚지 못 할 상황이 닥쳐 또다시 도망가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그는 "생갈의 기사"라는 가명을 썼다.
1763. 금욕적인 영국을 방문한 그는 문란했던 프랑스에서와 달리 푸대접을 받았고, 한 매춘부에게 사기를 당해 빈털털이가 되어버리기까지 했다.
체코의 프라하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보헤미아의 발트슈타인 백작 소유의 둑스 성에서 남은 생애를 마무리한다.
젊었을 때 문란한 생활을 한 탓인지 40대 중반에 성기능 장애가 와서 쓸쓸하게 살다가 1798년 6월 4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유언은
"나는 철학자로 살았고 기독교도로서 죽는다."
모짜르트와 동시대
동시대 음악가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오페라 <돈 조반니>를 작곡하고 있었을 때 60대 중반의 노년 카사노바가 그를 찾아간 적이 있다. 카사노바는 그에게 자신의 혁혁한 여성편력사를 자랑하며 돈 조반니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게 어떻냐고 제안했는데 안 그래도 부도덕하고 문란한 주인공을 묘사하는 게 영 난감했던 모차르트는 그 이야기를 듣고 차라리 돈 조반니가 훨씬 낫겠다며 원래 이야기 그대로 진행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모차르트도 한때 스카톨로지 성향이 있다거나 성적으로 문란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카사노바 정도는 아니었다.
카사노바가 알려진 계기
유럽의 왕족들, 교황 및 추기경들, 그리고 볼테르나 괴테, 모차르트와 같은 유명 인사들과 교제를 가졌는데 , 그가 잊혀지지 않은 이유는 보헤미아의 발트슈타인 백작(Count Waldstein)의 집에서 사서로 몇 년간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가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집필했기 때문이다.
카사노바를 다룬 작품
1993년작 카사노바 : 알랭 들롱 주연
2005년작 카사노바 : 히스 레저(다크나이트 조커 역) 주연 - 픽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아이언맨 슈트 MK-18의 이름도 카사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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