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보다 더 악질 친일 매국노 윤덕영. 그리고 아방궁 벽수산장
- ■ WORLD/● 세상이야기
- 2021. 1. 16.
윤덕영이 나라를 팔고 백성들의 피 , 땀 , 눈물로 만들어진 벽수산장은 겨우 100년도 못버티고 사라졌다. 그러나 영원히 사라지지않는 나라잃은 백성들의 상처로 남긴 최악의 친일파이자 재산많은 친일파. 이완용 , 윤덕영 이 두가지는 평생 잊혀지면 안된다. 그런데 아래와 같은 희귀한 인간도 있다.
↓"독립운동가 대충 살았던 사람들"..웹툰 작가, 도 넘은 막말
↓웹툰 작가 윤서인 씨가 어제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물
독립운동가 조병진 선생 가족의 집을 으리으리한 친일파 후손의 집과 대비해 올리면서, '친일파 후손들이 열심히 살 동안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고 적었다. 그러면서 '100년 전에도 독립운동가들은 대충 살았던 사람들이었을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이종락화백
윤덕영 尹德榮
● 1873.12.27.서울출생~1940.10.18.
● 구한말의 각료. 친일 매국노. 경술국적 중 한 사람
● 영돈녕부사 윤철구尹徹求의 아들
● 후작 윤택영澤榮의 형
● 순종의 비妃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큰아버지
● 처는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 회장 김복수金福綏
● 외척이라는 신분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본 제국의 침략 정책에 일조
●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뒤 ‘이왕직 장관’이 되어 고종을 감시하는 일을 했다
● 윤덕영 , 윤택영은 악질중의 악질이다.
● 1908. 시종원경
● 1910. 한일병합. 자작에 올랐다
● 1917. 순종으로 하여금 일본 왕실의 참배를 종용
● 1925. 중추원 고문
● 1935. 중추원 부의장
● 특이한 두상으로 대갈 대감이랑 호칭이 있다.
나라와 바꾼 인성. 백성의 피, 땀, 눈물
일본인들조차 윤덕영의 냉혹함 , 집요함에 치를 떨었다.
일본에 부탁을 고종이 듣게 만들어서 백성들의 피를 빨고 궁궐보다 더 넓은 집을 가졌다.
이완용이 30억 받았을때 100억 받고, 이완용이 가진 땅에 4배나 가지고 있을 정도로 악질이었다.
군신간의 예의나 종친간의 의리를 도외시한 채, 고종의 결의를 촉구하고 어전 회의를 형식적으로 개최하는 등 한일 합방의 배후에서 활약한 윤덕영의 공로는 매우 컸다. 윤덕영 또한 한일 '합방' 과정에서 자신이 막후의 제 1인자였다는 긍지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합방' 이후 논공 과정에서 이완용에게는 작위와 훈장이 거의 최고 수준으로 주어진 것에 비한다면 윤덕영에게 주어진 작위는 보잘것 없었다. 이는 병합 과정이 표면상 이완용에 의해서 진행된 것으로 나타났고 윤덕영의 공로는 이완용의 그늘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아방궁 벽수산장碧樹山莊
서울 옥인동 언덕 위에 프랑스식 대저택을 지어 놓고 살았는데, 서울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집이라 별명이 ‘아방궁’이었다. 조선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집이었다.
명월관 기생이었던 이난향은 후일 회고록에 “윤대감 집에 갔는데, 동무 기생이 측간을 찾아 갔다가 용무는 보지 못하고 ‘샘물’만 마시고 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변기였다”고 썼다. 아방궁은 서울에서 가장 먼저 ‘수세식 양변기’를 설치한 집이었다.
윤덕영이 장안의 기생들과 ‘여학생’들을 집으로 불러 노는데 ‘열심’이었다는 이야기는 언론매체에 공공연히 실어도 될 정도. 원래 윤덕영의 ‘아방궁’ 설계도는 민영환의 동생 민영찬이 주프랑스 공사로 있을 때 프랑스 건축가에게 부탁해 그려 왔던 겁니다. 하지만 민영환이 자결한 후 집안 재산이 줄어들자, 건물을 지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윤덕영에게 넘겼다. 반면 윤덕영은 다른 친일 고관들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팔아 재산을 불렸다.
윤덕영을 포함한 친일 모리배는 나라와 동족을 판 대가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대충’ 살면서 연산군 부럽지 않은 향락을 누렸다. 매국노(賣國奴)들과 그 추종자들이 ‘열심히’ 한 일은 힘 있는 세력에 빌붙어 가난하고 힘없는 동족을 괴롭히는 일이었다.
1910.08.22일 경술국치 일주일 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당시 조카딸 순정효황후가 치마에 옥새를 숨기자, 그때 이걸 빼앗은 그 장본인이 큰아버지 윤덕영. 이로써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고종과 순종을 협박, 왕실을 움직여 조선의 식민지화에 일조한 윤덕영은 그 대가로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그때 받은것 중 하나가 벽수산장. 위에 서술 한 것 처럼 그의 집에 일부이다.
↓벽수산장 양관 (1926년)
1910. 말 윤덕영은 친일행위로 번 돈으로 지금의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일대를 전부 매입한다. 이후 14~15년에 걸쳐 대저택 ‘벽수산장’을 지었다. 벽수산장은 멀리서 봐도 한눈에 띌 정도로 규모가 엄청났다. 심지어 뱃놀이를 하기 위해 외부에 200평 넓이의 연못까지 조성해 놓은 상태였다.
광복 후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언커크)사무실로 사용했가 1966년 4월 5일 화재로 전소되어서 1973년 철거되었다. 철거되기 전까지 약 7년간은 철조망으로 들러 막아 놓았지만 뚫어 놓은 개구멍으로 동네 어린이들 놀이터로 쓰였으며, 건물 터를 거쳐 가면 지역 관할 청운초등학교까지의 통학로가 100여 미터가 단축되어서 학생들은 자주 들어가곤 하였다. 아이들이 부르는 이름은 언커크였고, 매국노가 쓰던 별장이란 것까지만 알고 있었다. 건물은 대부분 타서 없어졌지만 2층 바닥 일부와 벽면이 남아 있었는데, 집안 천장에 수족관이 있었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쓰인 건죽 자재가 화려하고 마당도 넓고 규모가 컸다. 2019 정문 기둥 일부만 이후에 지은 건물 일부로 남아 있다. 바로 옆에 있던 이완용의 집 때문에 이완용 별장으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였다. 이완용 집도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된 사실이며 2003년 지어진 집이 오해를 받고 있다.
↓정문 기둥만 남은 곳
이완용과 윤덕영의 재산
친일인명사전에서 확인된 바로는 이완용의 재산은 이완용이 나라와 바꾼 땅은 4000평. 여의도의 8배면적. 당시 돈 300만원으로,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600억원 가량. 이완용은 해방직전에 땅들을 다 팔아서 현금화했는데 이게 다 어디있는지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후손들 중 국가를 상대로 땅반환소송걸어서 승소했던 증손자 이윤형이 마지막으로 캐나다로 이민가서 잘 사는데 나머지는 후손은 한국에서 그렇게 잘 살지 못한다고 한다.
이완용 땅을 30억에 얻었는데 그것 조차 이완용 땅의 0.05% 라고 한다. 이완용 땅에 4배인 윤덕영은?
그리고 여기에 한술 더 떠 친일파 중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은 윤덕영 . 이완용의 4배인 "19.467평" 즉 축구장 8개의 면적. 즉, 이완용 땅은 윤덕영 땅에 반도 채 안된다고 한다. 옥인동의 약 54% 지금의 서촌부지. 수성동계곡 , 배화여고 , 인왕산 자락까지 모두 다 윤덕영의 집터였였으며 아직도 그곳엔 흔적이 조금 남아있다. 집 안에는 능금나무밭 , 자연숲 , 한옥99칸 , 하천 이 있는총 "2만평"의 대저택.
말년
이후 만 15년이나 중임한 끝에 1940년 8월에는 중추원 부의장에 오른다. 그는 친일파 탐학으로 큰 악명을 떨쳤는데 동생 윤택영이 빚에 쫓겨 북경으로 달아날 무렵에는 옥인동에 특급 호화 주택 송석원을 지어 세인들로부터 빈축을 샀다. 그리고 이 집의 안방 마님으로 이길선李吉善의 딸을 앉힌 후 그 입막음으로 5만원을 준 일화가 있다. 또한 참봉 첩지를 대량으로 위조해 팔아먹는 사기극을 벌이기도 하였다. 대갈 대감은 천주교 잠지에서 윤덕영에 대한 글에서 나왔다.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후에는 조선 총독부 시국 대책 조사 위원을 지냈으며 아내 김복원은 일제의 전쟁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친일 여성 단체인 애국 금차회 회장을 맡아 금비녀 헌납 운동에 앞장을 섰다. 남편의 반민족 행각에 걸맞는 내조를 한 셈이다. 이처럼 몰락해 가는 조선 왕조의 친족으로서 일신의 영달과 부귀를 위해 왕실과 나라를 팔아먹은 그는 1940년 10월 18일에 사망
박노수 미술관
서촌에 있는 박노수 미술관은 원래 윤덕영이 그의 딸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이후 1973년에 남정 박노수 화백이 이 집을 구입하여 2011년까지 거주했다. 현재 미술관으로 쓰이는 모습을 보면 새로 지은 것처럼 보이나, 일제시대 초기에 지은 건물로 잘 보면 일본식 양식 중국식이 절충된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다.
↓박노수 미술관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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