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31운동의 중요한 의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중략) 을 계승하고 (후략)」 ▶대한민국 헌법 전문 中

 

1950년대까지 삼일절에는 명절처럼 상점들이 일제 철시하고 국기를 내걸었으며, 음악회, 학예회, 시열식, 시가행진, 봉화제 등이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1961년 5.16 쿠데타 및 1965년 한일협정 이후 3.1절의 위상이 크게 낮아지며 정부 차원의 형식적인 식전과 탑골공원 추념식만 사실상 남게 되었으며, 최대 국경일의 위치도 광복절에 내주게 되었다. 1980년대 대한민국 제5공화국 동안에는 국무총리가 축하연설을 대독할 정도로 천시당했으며, 이때부터 3.1절 경축사가 사실상 정부 정책 홍보의 장으로 추락하게 되었다.

 

↓1954.03.01. 촬영장소 : 대한민국 서울 탑골공원 에서 제35회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3·1절

三一節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Day

1919년 03월 01일 일어난 3·1 운동을 기념하여 제정된 대한민국의 국경일이자 공휴일

 

● 국경일 : 삼일절이 국경일임에도 이날을 '조의를 표하는 날'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

● 일제강점기 1919.03.01.토요일(음력은 1월 29일)의 만세시위를 기념하는 날

● 독립을 선언하고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인 독립선언일

●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1920년부터 공휴일로 삼고 있다.

● 유관순,손병희를 포함해 3000명이 참여한 대규모의 집단적 저항 운동

● 대한민국 헌법에서 명시한 헌법이념인 3.1운동 정신의 탄생을 경축하는 날

● 광복에 대한 한국인의 염원과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린 사건

● 독립선포 후 대한민국과 임시정부의 성립과 함께 삼일절이 시작되었다.

●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최대 국경일의 지위에 있었으며 다채로운 경축 행사가 베풀어졌다.

● 5.16 군사정변 이후 대부분의 축하 문화가 사라져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 날에는 정부 주최로 3부 요인은 물론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이 모여 기념식을 거행하여 대한민국의 헌법 기본정신인 3.1정신을 되새긴다. 이와 함께 나라의 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순국한 선열들의 유족 및 애국운동가들로 구성된 광복회 회원들은 따로 파고다 공원에 모여 그 날의 깊은 뜻을 되새기는 의식을 거행한다. 또한 민간 차원의 갖가지 문화 공연도 이날에 베풀어지며, 전국 관공서 및 각 가정에서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를 게양한다.

 

삼일절이라는 명칭은 중화민국의 쌍십절이나 미국 독립기념일의 별칭인 Fourth of July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

 

 

삼일절 노래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날을 길이 빛내자」
▶정인보 작사, 박태현 작곡 '삼일절 노래'

 

 

건국기념일

 

한편 임시정부 시기 독립운동가들과 해외 교포들은 삼일절을 대한민국 건국기념일로 인식하였다 : 1920. 포암 장병준 선생이 국내에 잠입해서 살포한 전단 <대한독립1주년축하경고문>에 3월 1일이 건국의 기념일로 언급되어 있었으며 이날을 대한의 자유독립을 선언한 이래 1주년 되는 첫 생일로 민족이 영원히 기념할 축일로 명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미주 지역 한인 신문인 <신한민보>(The New Korea)의 경우 3.1절을 Korean Independence Day로, 기념의 대상을 3.1운동과 대한민국 수립으로 언급한 바 있다. 1943년 주미외교위원부가 미국 상원 의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3월 1일에 세계의 한국인들이 한국 독립선언과 대한민국 수립, 임시정부 창립을 기념했다는 내용이 담겨 3.1절이 당대 한인들에게 대한민국의 건국일로 간주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윤봉길 의사의 천장절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피난을 함에 따라 성대한 식전은 치르기 어려워졌으나 간소하게나마 경축식을 이어나갔고, 중국 측 언론에서도 3.1절을 한국 혁명기념일로 표현하는 등 명실상부한 한인의 국경일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 이후 「독립선언일 : Korean Independence Day」이란 국경일로 지정되어 재외교포와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가에 의해 그 기념이 시작되었다.

 

 

3.1운동의 의의

 

대한민국 헌법은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다 : 3.1운동의 정신을 승계하여 정부를 수립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세계에서도 비슷한 예가 많지 않으며 광복절이 건국절이 아닌 이유가 삼일절과도 관련이 있다. 

 

3.1 운동을 계기로 하여 한반도를 비롯하여 해외 각지에서 존재하던 독립운동 구심체가 통일된 민주주의 제도의 임시정부 수립운동으로 이어져, 서울의 한성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연해주 대한국민의회가 상하이 상해정부가 합쳐지는 형태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이다. 즉, 3.1 운동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인 민주공화국 체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고 이 임시정부의 헌장과 강령, 헌법 등이 대한민국 제헌 헌법을 통해 계승되어 오늘날 헌정의 뿌리가 되었기에 대한민국의 출발일로서 국가가 축하하는 것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대한민국 자유와 평등의 생일이라고 연설했다.

 

「삼일절! 이 날은 가장 신성한 날이요.
대한민국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생일이니 진실로 상제가 허하신 날이오.
이 날은 일이 개인이 작정한 것이 아니오. 2천만이 하였고
다만 소리로만 한 것이 아니오. 순결한 남녀의 혈로 작정한 신성한 날이오.」
▶안창호, 3.1절 제1주년 축사에서

 

 

민족대표 48인

 

이 사건이 있기 며칠 전에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이라는 빈관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서를 발표하고 잡혀갈 예정이었으므로, 백업 요원으로 실제 시위를 주도할 15인이 더 있었다고 한다. 14인설과 16인설도 있으며 정노식을 제외하느냐, 김세환을 추가하느냐에 따라서 나뉜다. 실제 시위를 15인까지 모두 합쳐서 민족대표 48인이라고 불린다. 이들이 작성한 독립선언서가 바로 기미독립선언서다.

 

이 중 4인은 변절, 나머지는 끝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 변절자 : 4인

33인 중 3인인 박희도, 정춘수, 최린

48인 중 최남선

 

 

1920년대

03.01. 임시정부는 내무부 포고령 1호를 통해 3.1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 준비회를 발족하고 성대한 식전을 준비하였다. 상하이에서는 오전부터 한인 가옥마다 국기가 나부끼기 시작했다. 10:00 : 정부 차원의 경축식. 이동휘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임시의정원 대의원, 인성학교 학생이 모인 가운데 상해 올림픽 대극장에서 봉행되었다. 14:00 : 대한교민단이 주최하는 3.1절 축하회가 성대히 열려 여운형 교민단장의 연설과 이동휘, 안창호의 축사, 중국 남녀 학생들의 축하무를 아우르며 16:30 기념 행사가 끝이 났다. 그리고 한인들은 상하이 시가지에서 일본총영사관 앞까지 태극기를 들고 가두 행진을 벌였다.

 

↓최초의 삼일절 경축식

 

삼일절이라는 명칭은 1920년부터 사용되었으나, 당시 임시의정원에서 법률로 정한 국경일의 명칭은 독립선언기념일이었으며, 때때로 독립기념일, 국경일로 불리었다.

 

 

1945. 광복이후

대한민주의원에서 3월 1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법률안을 제정

 

 

1946.03.01.

광복 이후 ' 제27회 기념식을 기해 국가 경축일로 지정. 서울 보신각 앞에서 삼일절 경축식이 거행되었다. 식전에는 이승만 박사와 김구 주석이 참석하였으며, 김규식 박사의 만세삼창 제창으로 식을 마쳤다.

광복 직후 3.1절은 좌우익 대립의 장으로 대두되었는데, 국가 건설의 정통성을 3.1 운동에 두려는 좌파와 우파가 서로 대결함에 따라 경축식이 개별적으로 열리는 것은 물론 상호 간의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1948.08.15.

대한민국 정부가 성립된 이후 3.1절은 4대절에 포함되었으며, 대한민국 건립의 시원이 되는 최대의 국경일로 간주되었다.

 

 

1949.10.01.

대한민국 제1공화국 수립 이후  <국경일에관한법률>을 공포함으로써 국경일로 재지정

 

 

1950년대까지

명절처럼 상점들이 일제 철시하고 국기를 내걸었으며, 음악회, 학예회, 시열식, 시가행진, 봉화제 등이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1958.03.01. 제39주년 삼일절 경축 가장행렬

 

 

1960년대

1961년 5.16 쿠데타 및 1965년 한일협정 이후 3.1절의 위상이 크게 낮아지며 정부 차원의 형식적인 식전과 탑골공원 추념식만 사실상 남게 되었으며, 최대 국경일의 위치도 광복절에 내주게 되었다.

 

 

1980년대

대한민국 제5공화국 동안에는 국무총리가 축하연설을 대독할 정도로 천시당했다.

이때부터 3.1절 경축사가 사실상 정부 정책 홍보의 장으로 추락하게 되었다.

 

 

1999.03.01. 80주년 이후

전국 각지에서 학생과 시민들을 동원하여 만세행진 재현행사를 벌인 것을 두고, 사학계에서 이를 두고 3.1절을 잘못 기리고 있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3.1운동의 본질은 민족공동체의 본질적 주권(real sovereignty)를 바탕으로 자주독립을 선포한 것이고 우리가 흔히 아는 만세시위는 그러한 독립선언식을 축하하기 위한 요식 행위였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만세운동을 한 것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2005.12.29.

1949.10.01. 대한민국 제1공화국 수립 이후  <국경일에관한법률>을 공포함으로써 국경일로 재지정된 후 <국경일에 관한 법률>로 개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2019.03.01. 100주년

100주년를 맞이하여 전국 각지에서 행사가 개최됐다. 그 중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는 정부서울청사를 비롯한 인근 건물에는 대형 태극기가 내걸렸으며 문재인 대한민국 대통령과 각부 장관, 각계 인사와 시민 약 1만 명이 참석하였다.

 

국민대표 33인의 행진과 독립선언문 낭독, 독립유공자 포상이 진행되었다.

 

독립유공자 334명에 대한 포상에서는 유관순 열사에게 최고 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정오에는 전국에서 동시에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타종과 만세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서울 보신각에서 열린 타종 행사에는 강제징용 피해자인 이춘식 씨와 유관순 열사의 조카 유장부씨 등 독립유공자 후손 12명이 참여하기도 했다.

 

서울광장 일대에서는 만세 행진과 공연이 이어졌고, 시민 3,000명이 참여한 대합창 행사도 열렸다.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상징이미지와 브랜드 상징이미지

 

 

↓삼일절 : 대한이 스스로를 자유케하다 [Ep. 1] ⓒBBLOKK 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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