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소로스. 20세기 최고의 펀드매니저이자 현대 금융사의 신화적 존재

George Soros

조지 소로스

헝가리어로 : Soros György 쇼로시 죄르지

 

↓조지 소로스 ⓒ위키백과

 

● 1930. 헝가리 왕국 부다페스트출생

● 우대계 미국인, 헝가리계 미국인, 미국의 진보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
● 미국의 금융인. 기업인. 투자자
●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철학 / BA, MA, DPhil)

● 20세기 최고의 펀드매니저이자 현대 금융사의 신화적 존재

● 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 회장

● 현재 오픈소사이어티재단의 회장만 맡고 투자 현업에서 은퇴
● 배우자 : 타미코 볼턴

● 워렌 버핏과 동갑

● 유대인 변호사였던 아버지 슬하에서 유복하게 자랐으나 나치가 유럽을 장악하자 죽음의 위협 속에 살았다.

 

 

재산

 

2010년도 포브스의 발표에서 미국부자순위 14위를 차지했다. 

 

83억 달러 - 한화 약 9조 5300억 원. 2019.09. 기준 

 

전성기 : 가장 부유했던 펀드매니저. 무려 40조원의 재산가였다. 현재, 대부분의 자산을 오픈 소사이어티 재단에 기부하여 재산이 축소되었다.

 

 

2011.07.25. 81세의 나이로 펀드매니저 은퇴를 발표

 

물론 그가 투자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다. 투자금을 모두 투자자들에게 돌려준 후 가족 펀드(개인 재산)의 형태로 여전히 자금을 운용 중. 2015년 중국 버블 붕괴로 소로스의 가족펀드(개인재산)에서 대규모 손실을 봤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다.

 

 

환투기 공격

 

미국의 정치권을 등에 업고 태국 홍콩은 물론이고 영국이나 일본, 한국 등 동맹국들에게까지 환투기 공격으로 국가를 휘청거리게 하는 방식으로 치부하며 경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악한 구세주

 

제3세계 국가의 빈민이나 민주화 운동가들을 돕는 방식으로 이용해 정치적 수단으로 삼는 양면적 행보 때문에 사악한 구세주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02. 비즈니스위크의 발표에 따르면 5억 3600만달러를 기부금으로 내놓아서 6위의 기부가로 선정되었다.

1989. 민주주의·인권 운동을 목표로 하는 '오픈소사이어티재단(Open Society Foundations, OSF)'을 만들고, 매년 꾸준히 수억달러를 기부하였다. 

 

2017. 한방에 180억 달러 (약 20조원)을 기부했다.

2017년 소로스의 재산 추정치는 약 27조원인데 자기 재산의 70%를 기부한 것. 이번 기부를 포함해 지금까지 이 재단에 320억달러(약 35조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이 통큰 기부로 인해서 이 재단은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에 이은 두번째 큰 규모의 재단이 되었다. 

 

 

한국과의 인연

 

IMF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최규선 게이트의 주인공인 최규선씨의 주선으로 김대중과 자주 만남을 가졌으며 대표적인 거부로 알려진 알 왈리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자, 마이클 잭슨과 함께 화상회의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한 바 있다.

 

1997. IMF 사태 당시.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통화 폭락의 주범으로 공공의 적 취급을 받던 것과 대조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우는 대통령 당선자 신분의 DJ가 지난날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일에 호감을 보이며 투자 요청을 승낙, 1999년부터 본격적인 한국 투자 행보를 시작해 약속을 지키기도 하였다.

 

아무튼 헐값에 나온 한국의 증권사나 일부 기업을 인수해 사옥을 매각하고 고배당과 유증으로 돈을 챙긴 후 매각하고 철수해 1천억여원의 수익을 거뒀다고 한다. 다만, 이 무렵 대한민국 국민들의 금모으기 운동 여파로 국제 금값이 하락해, 환율시장에서는 기대치보다 큰 수익을 올리지는 못했다는 후문이 있다.

 

태국 바트를 공격하여 큰 수익을 올렸기에 비슷한 전략으로 대한민국 원도 공격해 봤지만 때마침 한국인들이 어마어마한 양의 금을 쏟아내서 포기했다고.

 

소로스의 한국투자에 대한 투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98. LTCM 파산으로 조지 소로스 퀀텀펀드의 자산 중 20%가 유치되있어서 한국에 투자 접근 자체를 못했다고 한다. 이후 부동산에 약간 투자를 했다.

 

2001.09.11. 테러 직후 한국 부동산을 전부 매각해서 2002년 이후 한국 부동산 상승기를 놓쳤다. 

 

1998~2002 4년 동안 한국에서 벌어들인 수익은 약 1억 달러(1200억 원)로 아주 적다.

4년동안 1억 달러므로 연간 2,500만 달러(300억 원)씩 벌어들인 정도인데, 수익률로 따지면 연 3% 수준.

 

퀀텀펀드가 투자자들한테 한 약정 수익률(매년 18%)에 훨씬 미달해서 당시 한국 투자를 담당했던 아시아 담당 이사를 소로스가 해임했다고 전해진다.


소로스와는 관계가 없지만 헤지펀드들이 원화를 공격할 기회가 다시 한 번 찾아왔는데, 그때는 왕의 남자의 점심시간 도시락 폭탄 사건으로 포기했다. 이 이후로 미국은 한국을 환율조작 감시대상국으로 보고 정부의 환율방어 정책에 주의를 주고 있다.

 

 

런던 정경대

 

1947. 동구가 공산화 되면서 런던으로 이주 : 런던 정경대(LSE)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복수 전공으로 <열린사회와 그 적들>로 유명한 칼 포퍼 밑에서 철학을 공부한다.

 

1951. 정경대 졸업.

 

1954. 석사 학위 취득.

대학을 다니면서 철도역의 짐꾼, 여행 세일즈맨, 은행의 수습 사원으로 어려운 생활을 꾸려 나갔다.

 

돈을 벌기 위해 펀드매니저계에 뛰어든 것은 순전히 

런던 정경대에서 심취해 버린 철학을 공부하는 데 경제적 제한을 받지 않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 펀드매니져계에 뛰어들었다. 펀드 매니저로 뛰어들 때 그가 목표했던 액수는 50만 달러로 이 정도면 철학 공부하는 데 밥걱정 안 하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제 이 업계에 뛰어 들고는 전설이 되었다.

졸업 후 런던에 있는 한 투자은행에 견습 사원으로 취직하면서 금융업계에 발을 디디게 된다.

 

 

월가의 트레이더로

 

1956.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월가에서 트레이더로 시작하여 뛰어난 주식 종목 선정 능력을 바탕으로 리서치 헤드로 자리잡게 되었다.

 

투자은행 내에서 자기자본계정을 운용하다가, 이 것이 고객 이익와 상충되는 것이 문제가 되자 투자은행에서 이 부분을 분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소로스도 함께 독립하면서 1969년 4백만 불 규모의 작은 헤지펀드를 만들어 운용하면서 펀드매니저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펀드 이름은 소로스 펀드.

 

알프레드 윈슬로우 존스 스타일의 롱숏 전략을 사용하며 소로스는 탁월한 투자 감각과 재귀성 이론을 바탕으로 한 통찰력으로 훌륭한 성과를 냈다.

1973. 짐 로저스와 함께 퀀텀 펀드 Quantum Fund 를 설립한다.

 

퀀텀펀드의 공동 창업자인 짐 로저스에 따르면 초창기 Quantum Fund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특히 닉슨 대통령의 사임 등으로 인해 주식시장이 폭락했었던 1974년 수익률 부진으로 인하여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으나 이후 회생했다고 한다.

 

↓ⓒ짐 로저스

 

 

Quantum Fund

 

1970~1980 : 4,200%의 경이적인 수익률. 당시 S&P 500 지수는 47% 상승

 

소로스가 저술한 책 중 하나인 '금융의 연금술'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은 분야의 수익률을 가져와 주었다고 서술 되어 있다.

 

● 레버리지를 동반한 당시 니프티-피프티로 불렸던 고평가 종목들에 대한 공매도

● 상기에 언급했던 REIT 투자

● 방위산업주 투자 등

 

↓짐 로저스가 말하는 퀀텀펀드의 4,200% 수익률 기록 [Ep. 5] BBLOKK OFFICIAL

 

 

 

파운드화 공매도

 

조지 소로스는 일반인에게도 공매도 개념을 인지시킨 인물.

 

현재 자신의 부를 이룬 가장 기본적인 방법인데 리스크 상황을 예견하고 공매도를 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가장 큰 사건은 1992. 영국의 검은 9월

 

1990.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ERM(환율조정메커니즘)을 통해 단일통화권 구축을 꿈꾼다.

영국은 ERM에 가입하고 이에 따라 파운드화는 독일 마르크화 대비 상하 6% 밴드 내에서만 움직이도록 고정이 되었고 밴드에서 벗어날 정도의 변동성이 발생할 경우 영란은행이 즉각적으로 개입해서 파운드화 가치를 안정시킬 의무가 생겨났다.

같은 해 독일이 통일은 한다.

독일은 동독 발전을 위해 천문학적인 투자를 단행하게 된다. 막대한 화폐가 풀리면서 인플레이션을 방어하기 위해 분데스방크(독일 연방은행)는 2년 동안 10차례나 금리를 인상하는 초강수를 두게 되었다.

 

독일의 초 고금리 정책에 의해 영국 파운드화는 가치가 절하된다. 파운드화의 가치를 밴드 내로 유지하기 위해 영란은행 역시 금리인상을 단행.

 

독일만큼 튼튼하지 못했던 영국경제는 실업률은 두자릿수까지 치솟았고 경기는 얼어붙었다. 그러자 자존심 강한 영국은 ERM 탈퇴 대신 영란은행이 열심히 파운드화를 매수하며 파운드화 하락을 방어했다.

조지 소로스는 영란은행이 허세라고 생각하여 언론을 통해 파운드화를 까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기 자본금+투자금 100$등 모든 자금을 동원해 파운드화 공매도를 친다. 

 

1992.09.16. 영국은 단기금리를 10%로 인상하며 파운드화 방어에 나섰으나 시장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항복하고  ERM을 나가게 된다.

 

그리고 파운드화는 수직으로 하강하여 소로스를 비롯한 헤지펀드 매니저들은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렸다. 결국 패배한 영국 정부는 유로화로의 전환을 포기했다.

 

 

 

2000. 이후

 

4월 퀀텀펀드가 기술주(IT버블)에 묶여 50억달러를 순식간에 날리자 그는 "헤지펀드의 시대는 갔다"고 선언했다. 이후에는 안전한 투자를 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 이후에는 파생상품이나 통화투자는 하지 않고 주식이나 채권에만 투자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2010년 퀀텀펀드를 해체하고 개인재산만을 운용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중국 증시를 중시하여 중국 주식(특히 공상은행과 상하이자동차)에 엄청난 투자를 했지만 2015년 중국 증시 폭락으로 엄청난 손실을 보고 2016년의 포브스 발표에서 갑부순위 100위 밖으로 밀려나는 굴욕을 겪은 바 있다.

 

 

소로스에 대한 영향력에 대한 과장

 

헤지펀드에 대한 전설은 사실이나 그가 독단적으로 영국 파운드화를 공격하고, 홀로 아시아의 수많은 나라를 금융위기(1997년 태국, 인도네시아, 그리고 대한민국의 외환위기)로 몰아넣은 것처럼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은데 사실이 아니다.

 

그 당시 아시아 국가들과 영국에는 헤지펀드들이 노릴 만한 경제 분야의 문제(금융)와 거품이 있었던것이 사실이고 소로스는 그 약점을 노려 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헤지펀드의 공격을 버텨낸 곳이 홍콩이고,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나라가 태국, 인도네시아, 그리고 한국이다.

 

소로스도 인간인지라 당연히 투자에 있어서 많은 실수를 맛보았고, 기술주 거품 때는 큰 위기를 맛보았다. 그 영향력 때문에 각종 창작물에서도 캐릭터를 차용하기도 한다.

 

환경운동

 

온실가스 감축, 대체에너지 개발 등에 대해 198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왔다.

 

오픈소사이어티재단에 기부한 이유도 오픈소사이어티재단이 민주주의 인권 운동 이외에 환경운동에도 나서고 있기 때문.

 

2010년대 가족펀드로 전환 후에 개인 자산들 역시 중국 투자 자산 이외에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 투자분은 대부분 친환경 기업들에 투자해왔다. 로열 더치 쉘이 멕시코만에서 대규모 오염물질 누출사고를 치자 소로스는 즉시 손절매를 하고 쉘을 비판했다.

조지 소로스는 환경운동에도 지속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그린피스나 그레타 툰베리 식의 극단적 환경운동에는 비판적이다. 환경운동이 극단주의로 치닫게 되면 오히려 환경을 파괴하려는 세력한테 명분을 안겨줄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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